Interview

김바리

무용가 / 몸악기 연주자

누가 보아도 참 멋진 예술가, 무용가 김바리를 처음 만난 것은 22년도 말 대금연주자 송지윤과의 즉흥연주 공연에서였다. 김바리의 몸짓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믿기 힘들겠지만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나는 대금과 앙상블을 이루는 그의 ‘음악을 들었다'라고 확신한다. 이성적 차원에서 세상을 만나며 언어를 통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몰두하던 한 불문학과 출신 열혈 대학 기자는 몸으로 소통하는 무용이라는 세계를 맞닥 드리며 자신이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고 새 장에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김바리는 공연장의 먼지와 창 밖에서 흔들리는 나무까지, 세상의 크고 작은 존재들을 춤으로 듣고자 한다.

이번 모나드 서울이 큐레이션한 공연-전시 <Sonic Sculptures in Motion>의 두 번째 날인 4월 8일에 필자(정은혜, 피아노)와 함께 공연하는 무용가 김바리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각자 와인 한 잔, 가성비 위스키를 한 잔씩 곁에 두어 그런지 더욱 편안한 대화가 오갔다.

<Sonic Sculptures in Motion> 김바리 x 정은혜 듀오 공연은 4월 8일 3시, 5시, 7시 세 차례 이뤄집니다. (예매 링크)


은혜: 제주도에서 살고 계시죠? 막 서울에 도착하셨다고 하셨는데 컨디션은 어떠신가요? 비행시간도 짧고 시차도 없지만 비행은 참 고될 텐데요. 또 자주 왔다 갔다 하시니까요.

바리: 원래 비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에요. 자주 다니면 조금 익숙해지려나 했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정말 저는 날아왔잖아요. 

은혜: ‘비행기를 탔다’가 아니라 ‘하늘을 날아왔다’인 거네요?

바리: 네. 내 몸이 또 내가 하늘을 날아서 왔다고 생각하니 다른 감각들이 느껴지며 좋았어요.

은혜: 정말 그러네요. 하늘을 날았다! 나름 즐겁게 무사히 오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번 저와의 공연에서는 어떤 내용이나 주제를 탐구해 보실 생각이세요?

바리: 공연-전시 제목이 “움직이는 소리 조각이 시공에 현현하다”이잖아요. 제가 연구하는 주제와 잘 닿아있어요. 춤이, 몸이 시공에 현현하는 어떠한 구현체로서의 작업. 저희가 함께 시도하는 것들이 어떻게 이 주제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안고 임하려고 해요. (공연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경험하고 그 경험이 또 다른 경험을 낳을 것이고요. 

은혜: 정말 공감하는 창작 또는 공연 방식이에요. 저 또한 순간에 생겨나는 음악적 소리 경험이 그다음의 소리를 낳는 방식으로 연주해요. 여기서 바리 님이 말씀하시는 경험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바리: 어떠한 도달할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 자체가 춤으로 또 음악으로 표현되는 것이죠. 제가 듣는 경험, 또 듣기를 경험한 몸의 상태인 것이에요. 어떤 다차원적인 경험의 상태인데, 춤도 그렇고 음악도 진동하는 상태이잖아요? 음악가와 함께 작업할 때 때로는 음악가의 연주가 내가 만드는 연주라고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만큼 서로의 진동하는 상태가 경험되며 경계가 블렌드(blend)되는 것 같아요. 

은혜: 말씀을 듣다 보니 제가 바리님에 대해 궁금해서 준비한 다른 질문들이 동시에 풀렸어요. 제가 작년 12월에 바리님과 공연을 하며 느낀 것이, ‘아, 이 분, 듣는 귀의 포용성이 어마어마하구나'였거든요. 이 포용력이 어디서 나왔는가 했더니, 나를 비워 세상의 소리를 경험하며 조응하는 데 있었군요. 그러고 보면, 이러한 삶과 세상을 대하는 바리님의 자세를 단련하는 수행이자 수양의 과정으로써 바리님은 춤을 추시는 것 같아요. 아니, 수행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떠신가요?

바리: One hundred percent(100%)에요! 아무래도 점점 더 어떤 프로덕션 베이스로 만들어가는 공연이 아니라 수행과 수련의 차원으로써의 공연에 더 다가가는 중인 것 같아요. 은혜님도 그렇지 않으신가요?

은혜: 저도 어떠한 음악의 형식적 결과를 지향하는 프로덕션으로서의 음악을 추구하지 않았었어요.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변화하는 시간과 공간 자체를 악보로 삼아서요. 그런데 요즘은 관객 및 청중과 만날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 프로덕션에 해당하는 일들을 많이 하게 되네요. 

바리: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또 공연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니까, 실험적인 맥락 안에서라도 편안함을 가질 수 공간을 찾는 등의 일이 필요해요. 

은혜: 그래서 저도 공연장, 연주자 섭외, 날과 시간 정하기 등까지 모두 작곡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바리: 아, 정말 좋아요.

은혜: 감사해요. (웃음) 그럼 다음 질문을 해볼게요. 무용가 김바리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리: 무용가 김바리는 춤을 닮고 싶은 사람입니다. 결국에 춤이 되는(becoming) 것이 꿈인데, 가능하지는 않은 시지푸스의 운명과 같은 일이지 않을까 해서 “닮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춤이 뭘까라는 질문을 품고 보니 춤 안에는 춤이 없어요. 춤을 이룬다고 생각했던 요소들은 춤이 아니고, 춤 안에는 춤이 없는 거예요. 그보다는 어떤 상태가 되고 싶어요. 비워진 몸 그릇으로 고요히 역동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그렇게 공연하고 있습니다.

은혜: 김바리 자체가 악기인 거네요! 악기도 빈 공간, 공명통이 없으면 울리지 않으니까요. 실제로 이번 공연에서의 역할이 무용가이자 몸악기 연주자이시기도 하고요. 전에, 이름 ‘바리'를 바리데기에서 따오셨다고 했는데 또 그릇이란 뜻의 ‘바리'도 그 의미가 예술가로서의 지향점과 맞다고 하셨던 게 기억나요.

바리: 맞아요. 제가 어떠한 미디엄으로써 역할을 하기 위해 비워진 그릇인 것이죠. 저에게는 몸이 악기라서 좋은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를 써요. 

은혜: 몸 자체가 악기이고 ‘나’와 조응하는 모든 것들 담아 만나는 공간이 되겠네요. 아까, 춤을 닮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럼 바리님에게 춤이 무엇인가요?

바리: 춤이 무엇인가… 사실 저는 춤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화두를 들고 있어요. 춤을 알고 싶은데 머리로 알기는 싫고 정말 알고 싶어서 계속 춤을 추고 있는 거예요.

은혜: 참 멋져요. 바리님에게 춤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르렀을 때 완성되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바리: 오래전에 한 일본 부토 무용가의 공연 영상을 봤어요. 나이가 지긋이 든 할아버지 무용가였어요.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손으로만 춤을 추셨죠. 그분이 춤을 다 추고 나서 커튼콜하는데 바닥에 뒹구시더라고요. 관객들이 던져주는 꽃 향기를 맡으면서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동물인가 아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은혜: 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해낸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일까요?

바리: 자아도취 같은 것이 전혀 아니라 진심으로 본인의 춤에 감동한 것 같았어요. 그렇게 춤을 추는 축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지금까지도 계속 곱씹어 보는 장면이에요. 내가 ‘기갈나게 춤을 췄다’, 이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무용으로 스스로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거예요. 과연 그 경지가 무엇일까요? 공연도 좋았지만 공연 후 그 부토 무용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제게 위로가 되었어요.

은혜: 저도 예술가로서 나아갈 방향과 지향점을 몸소 보여주며 영감을 주는 선배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면 저의 음악활동에도 동력이 생기면서 큰힘을얻어요. 그중 한 분은 80세가 넘으셨는데 젊은 음악가들보다 훨씬 더 창작활동이 활발하시고, 이미 유명하시지만 예술적 정신의 첨예함을 전혀 잃지 않으셔요. 제가 팬이라고 할 수 있는 아티스트분들이 외적인 성공 후에 그런 edge를 잃는 경우를 보면서 실망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거든요.

바리: 아, 그런 경우는 너무 바빠져서 자신의 예술에 깊이 몰두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걸까요?

은혜: 지금 생각했던 그분은 그런 것 같아요. 프로젝트나 공연도 많고 음악 외적인 일들이 많으신 것은 확실해요. 애초에 그런 위치/자리까지 가신 것의 취지는 자신의 안위와 성공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음악에서 예전만큼의 저항 정신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에요. 팬으로서 조금 아쉬워요. 바리님은 겉으로만 그러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타인의 예술 세계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신다고 느껴요. 

바리: 네, 우리 모두 각자가 다르잖아요. 또 제가 그들의 우주를 모르니까 당연한 것 같아요. 저는 작품을 볼 때 그 작가를 진심으로 알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만나거든요. 그 작품을 작업자, 예술가의 세계를 중심으로 이해하려 해요.

은혜: 와, 제가 생각하는 평론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에요.

바리: 무용은 아무래도 몸이 전면에 드러나는 작업이에요. 시각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뇌에서 더 크리티컬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요. Categorization(범주화)하고 어떤 레퍼런스에 비추어 잘되고 못됨을 평가당하는 몸이 되기 쉽죠. 그러나 각자의 우주가 있고 나의 우주에 내가 존재하잖아요. 저도 평가하려는 나와 존재하려는 내가 있는데, 공연장의 먼지들처럼 공간 속 모든 존재를 바라보며 춤을 추면 크리티컬함이 잦아들고 존재할 수 있게 되어요. 

은혜: 음악은 시각적인 요소가 적지만 그럼에도 비슷해요. 예컨대 한 앨범이 있다면, 그 앨범을 하나의 완결성을 갖춘 객체(object)로 두고 글을 쓰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이 되는 내용과 맥락을 반영하기 어렵단 생각을 해요. 저의 작업은 시공 속 음악 행위의 자취로서의 형상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바리: 음악도 그럴 수 있겠네요. 모든 제도화된 예술교육이 그렇듯이 무용도 트레이닝 초반에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서 수준을 어느 정도 끌어올려놓아야 하는 관습적 춤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있어요. 

은혜: 그 초기 단계를 지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군요.

바리: 춤으로, 춤 안에서 자유롭고 싶은데 습習이 된 춤에 갇혀버리면 마치 노예상태가 된 것 같아요. 

은혜: 저희 필드에서 ‘learn and unlearn’이란 말을 하기도 해요. 

바리: 춤훈련을 하다가 나의 춤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찾아왔어요. 해답을 찾기 위해서 존경하는 무용가 리스트를 만들었어요. 결국 네 분 정도께 찾아가서 ‘춤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드렸죠. 한 분은 춤은 ‘음악을 잘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하셨고 또 한 분은 ‘트레이닝을 하라'라고 조언을 하셨어요. 또 한 분은 저의 팔을 돌려보라고 하시면서, ‘봐라, 그게 너의 춤이다'라고 하셨죠.

은혜: 마지막 부분은 선문답禪問答 같네요. 

바리: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춤은 정해져 있지 않구나’였습니다.

은혜: 한 분 한 분 다른 답을 하신 것을 바탕으로 그렇게 훌륭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것이 멋지네요. 지금도 스스로에게 항상 화두를 던지고 또 꾸준히 공부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지난번에 뵀을 때는 발생학(embryology)을 살펴보고 계셨죠? 요즘은 어떤 공부를 하시나요? 또 영감을 서로 주고받는 동료라든가 아티스트가 있나요? 

바리: 요즘은 다양한 음악을 참 많이 들어요. 무용의 경우 영상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전통춤을 살펴보고 있어요. 현대에 와서는 많이 필터링되어 느낄 수 없는 원형의 와일드함과 생동감을 느끼고 배울 수 있어요. 네, 발생학도 그렇고 바디 마인드 센터링, 해부학, 장기에 관해서도 꾸준히 공부하고 있고요. 저는 사실 책상에 앉아 오랫동안 공부하지는 않아요. 

은혜: 공부가 문자와 책을 통한 이성적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것도 공부이고, 오히려 그렇게 공부가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충분히 이해가 되어요. 

바리: 네, 맞아요.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그러한 지성적 차원의 공부와 수행적 차원의 공부를 조화롭게 이뤄갈지 그 방식을 찾아가고 있어요. 

은혜: 예종에서 무용 공부하시기 전에는 불문학 전공하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과정으로 무용가의 길에 들어서셨나요? 

바리: 네, 불문학을 전공했는데, 그보다는 대학교 취재 기자로 또 방송 앵커로도 활동을 많이 했어요. 그때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꿈이었고요 다른 길은 생각해보지 않았었어요. 한예종에 들어가서 처음 제가 만든 것이 다큐댄스멘터리였어요. 그러니까 무용에 관한 취재를 하다가 춤을 만난 거예요. 제가 취재하려는 곳에서 허락을 받지 못해 몰래 그들의 공간에 들어가 무용하는 2시간을 보았어요. 그 2시간이 저에게는 2초처럼 느껴졌죠. 그리고 배신감이 들었어요.

은혜: 왜 놀라움이나 감동이 아닌 배신감일까요?

바리: 왜 지금까지 내게 아무도 이런 세계를 알려주지 않았는가 하는데서 온 배신감이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평생 머리로 살아왔어요. 사회의 현실과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를 이성적으로, 머리로 해결하려고 했던 사람이고 그런 세계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제 눈앞에 몸으로만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과 그 세계가 나타난 것이죠. 그 후에 한 무용 단체를 찾아가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머리로 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눈앞에 펼쳐지는 몸의 움직임이 제 몸에 바로 입력이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글로 메모를 해서 따로 집에 와서 연습하기 시작했어요.

은혜: 요즘 같으면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었을 텐데 어쩜 종이에 그림을 그리셨군요. 

바리: (웃음) 하하하, 정말 그랬네요. 그렇게 동작을 기록해서 이것을 바탕으로 집에서 연습을 하려는데 공간이 적합하지 않아서 고민을 하던 중 동사무소에 문화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동장님을 찾아가 만나서 저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 문화공간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공간을 후원해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동장님은 원래 개인을 위해 쓰는 공간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꼭 유명한 무용가가 되라고 격려를 해주시면서 결국 허락해 주셨죠. 

은혜: 이 과정이 영화 같아요. 감독으로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이 아니라 인생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드셨네요. 그 동장님이 지금의 바리님을 다시 만나면 큰 보람을 느끼시겠네요.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어요. 일상에서 김바리의 몸은 춤을 추는 것일까요?

바리: 저에게 있어서 살아있는, 깨어있는 상태가 모두 춤이에요. 예를 들어 그릇을 설거지한다고 할 때 그냥 일상에 매몰되어 반복하는 행위라면 일상적인 행동이 되겠지만, 나의 몸이 움직이며 손에 물이 닿는 등의 상태를 듣게 되면 춤이 되는 것이죠. 

은혜: ‘듣다'라는 동사 말고 다른 표현은 없을까요?

바리: ‘깨어있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은혜: 처음에 춤과 듣기의 연결성이 확 와닿지는 않았는데, 춤에 있어서 각성한 ‘듣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바리님을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관객은 아무래도 무용을 주로 ‘보게' 되잖아요. 몸체와 그것이 움직이는 형태를 시각적으로 바라 봄으로써 자신만의 경험을 만들어가는 것일 테니까요. 제가 관객으로 있다면 바리님이 공연 중에 어떤 ‘소리’를  ‘들으면서' 작업을 하시는지 보고 또 ‘듣기 위해' 노력해 볼 것 같네요. 소리란 것이 음악적 소리와 소음도 있겠지만 다양한 존재 자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파장이라는 생각이 들고, 바리님은 그 영역까지 듣고자 하는 모습이 느껴졌었습니다. 음악가들도 깊이 듣는 분들은 소리와 음악적 형태 너머의 이면을 들으시더라요. 끝으로 이번 저와의 듀오 공연에 오실 관객들을 위해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바리: 정은혜라는 사람, 김바리라는 사람과 그날 우리의 상태, 저의 몸이라는 악기, 그리고 우리와 공존하는 풍경이 끊임없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며 연주할 것입니다. 그런 표현들이 또 다른 풍경을 이룰 텐데요, 이 풍경들 속에 관객 여러분들이 열린 상태로 함께 들어와 주시기 바랍니다. 

Written, edited by Eunhye Jeong on 03/25/2023

Interview conducted on 03/2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