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충돌과 승부

03 Collision and Contention

이번 편에서는 충돌하는 두 개체의 운동과 음양 양극의 승부작용을 이야기합니다.


두 인격의 만남은 두 화학물질의 접촉과 같다: 어떤 반응이 있다면, 둘은 변모한다.

— 칼 융

The meeting of two personalities is like the contact of two chemical substances: if there is any reaction, both are transformed.

— Carl Jung


음양승부

음양론을 (서구적인 사상을 바탕으로한) 이원론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를 더러 발견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음과 양을 마치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근원적으로 다른 독립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음양은 성질과 상태를 말하며 우주 만물을 운동하고 작용하게 하는 역동적인 힘에 관한 것입니다. 낮과 밤은 개념적으로는 독립적으로 대립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가장 깊은 밤에서 점진적으로 밝아지고 가장 밝은 낮에서 점차 어두워지며 밤이 되는 연속성있는 변화 안에 낮과 밤이 존재합니다 [figure 1]. 또한 낮과 밤은 서로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입니다. 대한민국에 해가 중천에 떠있다면 지구 반대편 나라 우루과이는 한밤중입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한낮과 우루과이의 한밤이 서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대립된 현상임을 시사합니다. 즉, 낮과 밤은 이렇게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에게 종속되면서도 (인력) 각각 서로에게 반대하는 방향성을 갖고 움직이는(척력) 음양의 실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이나 공기의 대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뜨겁고 아주 차가운 물과 같이 극한으로 대조되지 않더라도 미세하게나마 온도에 차이가 나면 대류는 일어납니다. 이렇듯 음양은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차이로 인하여 둘로 분화된 하나이자 하나의 근원에 존재하는 양 극을 뜻합니다. 그리고 음양론은 이런 상대적 차이로 인해 비롯되는 음과 양의 상호적으로 운동하는 작용을 다룹니다. 이 작용을 음양승부라고합니다. 

승부勝負는 말 그대로 서로 겨루어 이기고 지는 것을 가리는 일종의 다툼을 뜻합니다. 승부작용을 조금 현대적으로 혹은 중의적으로 번역하면 “상호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고대의 선조들이 포착한 그 우주 운동 모습을 더 구체적이고 또렷하게 그려내는 표현은 ‘승부’가 아닐까 합니다. ‘서로 서로’라고 하면 피상적으로 그저 두 개체가 관련되어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서로에게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를 알기는 어려우니까요. 힘의 ’다툼‘에서 그려지는 이미지는 훨씬 또렷합니다. 서로 상대에게 가해지는 힘의 작용과 반작용을 모두 관찰할 수 있으니까요.

한편 우주 자연의 이치가 “싸우는 것이라”라고 하면 평화와 안정을 자연의 본성으로 생각하거나 이상적인 가치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와닿지 않는 말일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겉보기에 나무는 정적이고 수용적이며 평화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도 물과 영양분을 물관과 체관에서 끌어당기고 밀어올리는 일을 치열하게 하면서 자신을 생을 영위합니다. 식물의 삼투압을 통한 광합성 작용은 승부작용과는 관계없어 보입니다만, 저 멀리 1억 5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태양이라는 한 개체에서 나오는 빛에너지와 지구라는 한 지점에서 뿌리가 끌어올리는 물이 나무라는 지점에서 충돌하고, 물관과 체관을 사이로 오고 가는 영양분과 물의 이동이 교차하며 나무의 생명이 작용하는 우주적인 음양승부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승부라는 일반적 의미와 가까운 예는 스포츠 경기나 결투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펜싱경기를 보면 대치하여 결투하는 두 선수가 밀고 밀리면서(당기면서) 접전을 벌입니다. 두 펜싱칼은 서로 충돌하고 또 멀어집니다. 그 치열한 경기를 보노라면 두 선수간에 ‘스파크가 튄다’라고 말이 절로 나옵니다. 두 극의 충돌과 마찰, 또는 유순하게 표현했을 때 ‘만남’은 부싯돌처럼 모종의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충돌과 마찰은 두 극이 돌면서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과정 중 가까워지는 ‘수축’ 즉 ‘인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척력’ 즉 서로 멀어지는 과정이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음양승부는 이렇듯 두 극이 멀어졌다 가까워지며 모종의 충돌을 이루고 다시 멀어지는 운동을 반복하게 됩니다.


[figure. 1] 음양론은 근원적으로 다른 독립체의 대립을 상정하는 이원론이 아니다. 지구의 한 편이 낮이면 반대편이 반드시 밤이 되듯 상호의존적이며 대립하며 작용하는 두 힘의 운동에 관한 것이다. 지구의 한 지역이 고정적으로 언제나 밤이 아니라, 밤의 끝과 낮의 끝이 교차하면서 낮으로 서서히 나아간다.


[fig. 2] 스파크가 튄다. 충돌할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열, 전기, 빛에너지 등으로 전환된다.


 
 

충돌, 마찰, 교차 

각각의 존재가 드러나는 형태는 다를지라도 모든 만물은 근원적으로 같은 “힘 (또는 기)”을 가지고 운동하며 언제나 그러한 움직임의 과정 중에 있습니다. 충돌, 마찰, 교차는 이러한 운동 중 음양승부의 작용 중 수축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물리학적 개념 혹은 물리적 현상입니다.

물론 물리학에서의 충돌, 마찰 그리고 교차의 개념은 각각 다른 맥락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충돌은 두 개 이상의 개체가 부딪히면서 짧은 순간 작용하는 힘을 설명하고, 마찰은 서로 다른 두 개체가 서로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힘, 즉 마찰력에 관련되어있으며 교차는 두 개 이상의 개체나 경로가 겹치거나 교차하는 공간에서의 위치적 지점에 대해 주로 관계됩니다. 특히 파동의 교차와 관련된 경우 파동이 다른 매질로 전달되는 지점에서 매질과 파동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달라지는 파동의 속도, 진폭, 방향들을 설명한다고 합니다.

보통 마찰의 경우 그 ‘닿음’의 길이와 시간이 충돌이나 교차보다 길게 기술되곤합니다. 예를들어 컬링의 스톤이 일정거리를 운동할 때에 어느 지점에서 멈추게 되는데 이는 얼음바닥이 미끄럽기는 해도 분명하게 작용하는 마찰력 때문일 것입니다. 스톤은 평균적으로 25에서 45미터정도 나아간다고 합니다. 이 거리는 지구 표면에 서있는 사람이 감각하는 척도에서는 꽤 길게 감각될지 모르지만 지구 밖에서 보면 지구 바닥 표면의 굴곡은 물론 공간적 거리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점과 같을 것입니다. 다른 예로 야구공이 배트에 충돌할 때에나 골프공이 골프채 헤드와 충돌할 때를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찰나의 순간적인 작용으로 이 충돌을 경험합니다. 이 짧은 시간을 느리게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경험한다고 가정 해봅시다. 충돌 각도에 따라 공이 다소 넓은 면적으로 스치듯 거리를 마찰하며 공의 면적과 배트나 골프체 헤드가 교차하는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매우 빠르게 세게 부딪히는 공을 초고속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보면 골프공처럼 딱딱한 공 조차 찌그러지며 왜곡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접촉하는 두 물체 (헤드와 공)의 표면은 단지 공이라는 구체의 한 점이 아니라 훨씬 넓은 면적이 닿게되며 또한 그만큼의 마찰력이 작용합니다. 속도, 배트나 골프채의 각도 그리고 마찰력이 공의 운동 방향, 속도 등을 조절하는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또한 골프채가 스윙하는 경로와 골프공이 튕겨져 나가는 경로의 포물선을 그려보면 바로 골프공과 헤드가 충돌하는 지점이 교차지점이 되는 것입니다. 파동을 예로들면 빛 에너지가 빨간색으로 도색된 의자에 충돌하여 ‘부딪혀’서 흡수되지 않고 튕겨져 나오는 빛 파동이 또한 나의 눈의 시신경에 ‘닿아’ 우리가 색을 감각합니다. 파동의 움직임과 그 경로를 그려본다면 바로 그 닿는 지점들이 교차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충돌, 마찰, 교차와 같이 분리되어 다루어지는 각 개념이 물리적 실재에서는 모두 동시에 일어나기때문에 완벽히 분리할수가 없고, 또한 관점(시간과 공간의 척도)에 따라서 면이 점으로, 점이 면으로 보이므로 관점의 변화에 따라 더 어울리는 개념이 운동을 설명할때에 사용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충돌, 마찰, 교차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원형적 원리

  • 두 개(이상)의 개체가 운동하여 작용한다. 

  • 그 개체들이 서로 멀어졌다 가까워지며 맞닿는다. 

 

[fig. 3]

[fig. 4]

[Fig. 5] 중력파 관측 GW170817에서 감지된 두 개의 중성자 별 간의 합병의 최종 단계. (Source: Nature)


충돌/마찰/교차와 음양승부

모든 소리의 탄생에는 어떤 형태로든 물리적 부딪힘이 선행되어야 함을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 부딪힘이라는 물리운동의 한 편린을 떼어 놓고 분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부딪힘만을 분리해서 해석하는 것은 물리운동의 전모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충돌/마찰/교차 충돌/마찰/교차가 일어나는 순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전全과정을 포함해서 살펴보아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음양승부는 단지 음양이 ‘싸우는(승부)’ ‘닿고(contact)’ ‘부딪히는(collision)’ 순간 뿐만 아닌 모든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하나의 충돌/마찰/교차에는 서로 멀어진 두 극점 즉 멀어진 위치에서 대치하는 두 개체라는 전前단계가 존재합니다. 하나의 소리는 두 개체의 밀고 당기는 힘의 다툼과 이로 인한 운동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바이올린의 활이 현으로부터 떨어진 상태에서 특정 속도로 현에 다가와 마찰하는 과정을 관찰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손이 활을 들어올릴 때에 두 개체간의 척력이, 활과 현이 충돌하며 마찰할때에는 인력이 작용합니다. 현은 고정되어 버티면서 활의 움직임과 반대방향으로 작용합니다. 한 호흡(phrase,구절)의 ‘소리' 사건은 활이 현에서 떨어지는 순간 끝이나지만 이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활이 현에서 떨어지고, 멀어지다가, 다시 서로에게 돌아가면서 또 다른 충돌/마찰/교차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과 활의 두 개체가 수축하고 팽창하면서 현과 활의 호흡을 합니다. 사람이 숨을 내쉬기만 하지 않듯,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에도 들이마시고 내쉬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이렇게 작용과 반작용의 상호작용, 즉 음양승부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음양승부는 단지 음양이 충돌하는 한 부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부딪히고 멀어지는 호흡 과정 전부를 포함하는 개념인 것입니다.

물론 각 개체의 힘이 동일하게 작용한다면 사실상 운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모든 개체들 중 완벽하게 같은 것은 없습니다. 파동으로 예를 들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개의 파가 정확히 반대 방향에서 진동하며, 진폭과 주기가 서로 같을 때, 두 파는 상쇄되어 서로를 상쇄시키고 결과적으로 아무런 진동도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이를 파동간섭의 상쇄라고 하며, 노이즈 캔슬레이션 등 기기에 쓰이는 원리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물리적 요소들이 존재하는 실제 물리세계에서 완벽한 파동간섭 불가능하며 이론적으로만 성립합니다.

이러한 두 개체의 필연적인 차이로 인해 주와 객이, 양과 음의 자연스럽게 설정됩니다. 바이올린의 양 끝에 고정된 현은 땅과 같이 ‘앉아’(정靜)있고 연주자의 정신과 몸이 통합된 어떠한 의식적 물리적 지점에서 운동하는 활은 활발히 움직입니다(동動). 이로써 현은 음, 활은 양이라는 객과 주의 관계가 생겨납니다. 정과 동, 음과 양은 이렇게 두 개체의 상대성 그리고 상대적인 차이로 인하여 발생하며 이러한 차이로 인한 힘의 ‘기울어짐’으로 인해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fig. 6] 하나는 이미 양극(원), 음극(방), 중성(각)을 품은 가득 찬 상태의 태극과 같은 ‘하나’다. 이 둘이 분열할때에나 다시 수축하여 새로운 시너지를 낼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 셋을 모두 안고있다. 수축하는 지점인 1과 3은 — 음운에서의 초성과 종성 자음 “씨앗” — 충돌/마찰할 뿐만 아니라 두 극이 ‘교차’하여 자리를 바꾸는 지점이다. 과정인 2는 해와 지면이 최대각으로 향해가는 것과 같이, 또는 식물의 씨앗이 위(나뭇가지와 잎) 아래(뿌리)로 확장되어 펼쳐지는 것 과 같이 두 극의 ‘분열’한다. 동시에 다시 해가 떨어지며 각이 줄어드는, 또는 열매로써 또 다른 씨앗으로 영들어가는 ‘수축’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면적인 존재다. (© Monad Seoul by CAC)


음악행위에서의 음양승부

이러한 음양의 상호작용, 즉 음양승부는 앙상블을 이루는 연주자간에도 발견되는데 특히 자유즉흥연주에서는 그 상호성과 주와 객의 유동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자유즉흥연주는 특히나 각 연주자간의 평등한 관계설정이 두드러지는 음악행위입니다. 이 평등함은 각 음악가(연주자) 개인의 균질화를 통해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각각의 한 개인이 자신의 개성이 그 본위를 지키며 존재하되 각자의 자연스러운 차이가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하면서 이뤄가는 조화입니다. 여기서 개성에는 운동선수로 치면 ‘체급’까지도 포함합니다. 질적 ‘성性’과 양적 ‘성性’ 등 한 개인을 이루는 모든 측면의 개성을 말합니다. 이는 마치 씨름 선수가 경기를 할 때에 누군가가 언제나 완벽히 밀리고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엎치락 뒤치락 하는 것처럼, 팽팽하게 맞서고 부딪히는 상호작용을 하면서 주객의 위치를 바꿔가는 승부와 같습니다. 

두 연주자의 관계는 개인과 개인, 한 사람과 한 사람의 만남인데 평등함은 당연히 차이의 부재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를들어 대금과 그랜드피아노는 소리의 크기와 음역대, 악기의 성격 모두가 많이 다릅니다. 연주자 각자의 개성과 각자가 쌓아온 음악적 경험과 언어의 역사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갖고 연주를 할 때에 누가 주가되고 객이 될 것은 딱히 없다로 하더라도 미세하게 음악적 흐름을 주요하게 끌고가는 연주자와 함께 조화를 이뤄가며 따라가는 쪽이 설정이 되곤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역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음악적 흐름안에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연주자 간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음악적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평등함을 볼 수 있습니다. 잘 짜여진 조성음악의 경우 하나의 조가 설정되면 그 조에 해당하는 각각의 음에 경중과 뚜렷한 역할이 설정됩니다. 딸림화음과 딸림화음과 같은 역할을 하는 화음들은 으뜸화음으로 귀결되지 않으면 불안정한 느낌을 줍니다. 즉 특정 조성에서의 하나의 코드는 반드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음악이 이뤄지는 사회적 관계에서도 분리된 역할과 다소 수직적인 관계설정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유럽 전통에서 발현된 음악 양식 (일반적으로 말하는 클래식)에서 작곡가는 신이고 지휘자는 이를 매개하는 중간자적 존재이며 이를 따르는 것이 연주자라는 메타포적인 이야기 또한 있지요. 자유즉흥연주에는 각 연주자 자신이 작곡가이며 지휘자이며 연주자이자 청중이 됩니다. 듣기도 창조적인 경험이며 이러한 견지에서 자유즉흥연주의 지향은 현재적 시공에서 창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필자의 음악적 경험에서 연주자 간의 음양승부가 두드러지고 독특하게 펼쳐진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5월 18일 흑석동에 위치한 중력장에서 서울 동작구의 문화기획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자유즉흥연주 쇼케이스를 했습니다. 22년도 5월에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대금 연주자 송지윤님과 꼭 1년만의 듀오 연주였습니다. 중력장의 피아노는 Prepared piano, extended technique을 과감히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기에 건반을 눌러서 연주하는 기본적인 주법 이외의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악기를 연주를 하다가 지윤님이 피아노에 다가와 피아노 현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피아노를 떠나 반대편으로 걸어갔습니다. 잠시 대금연주자 자리에 앉았다가 방울소리가 나는 반려견 놀이감을 흔들면서 관객을 향해 또 무대를 시계방향으로 한번 돌고 저의 자리에 돌아갔었죠. 한 무대라는 중립적인 장소에서 두 연주자가 물리적으로도 자리를 바꾸어서 연주한 것입니다. 무대, 또 무대가 펼쳐지는 공연이라는 하나의 주어진 시공간은 두 연주자라는 두 극을 품은 ‘가운데中’이며 ‘장field’이었는데, 이 안에서 음악/소리를 통해서만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아니라, 공간적으로 연주자가 위치를 서로 바꾼 것은 마치 하나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의미있는 교차 작용으로 느껴졌습니다. 두 연주자라는 두 극이 소리 에너지를 통해 밀고 당기며 수축과 팽창하던 것이 마치 공간 자체에 대류가 일어나듯 했습니다.

[fig. 7]

이는 마치 달의 힘이 주가 되는 밤과 해의 힘이 주가 되는 낮의 자리가 바뀌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우리 우주와 같았습니다. 모든 작용은 운동이며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운동을 일으키며 필드에 작용합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는 것이 ‘중中’이며 중용이고, 한국적인 (또는 동양적인) 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계를 설정하여 오열을 맞추어, 고정적이며 절대적이고 추상적인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서구적 전통의 미학적 이상이며 그러한 서양 세계관에서 말하는 조화라고 한다면, 동양의 중용과 동양의 조화는 단순히 생멸의 흐름이나 인생무상에 대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무한한 변화가 아니라, 충돌과 교차의 끝없는 작용을 통하여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우주의 생명력 넘치는 창조이며 그 모든 운동과 변화 속에서 펼쳐지는 형상들이 하나이자 가운데인 필드에서 어우러지는 모습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무리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두 개체는 상대적인 다름과 차이로 각각의 음과 양의 극성을 지니게 되는데, 이 둘이 대치한 후 서로를 끌어당기며 충돌, 마찰, 교차하여 다시 멀어지며(분화) 그 충돌 과정에 의해 변화한 새로운 하나를 이룬다. 이 전全과정을 음양승부라고 한다.

이번편에서는 수축하며 충돌, 마찰, 교차하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음양승부의 개념을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충돌하는 하나의 지점과 이에 작용하는 서로 다른 두 극을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면, 두 극이 아닌 셋의 작용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다음 편을 통하여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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