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구조와 음악

우리는 세계가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인간 및 비인간 모두에게 해당하는 특정한 사건의 패턴들이 반복되며,

본질적으로 거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중 상당 부분을 설명합니다.

We have a glimpse, then, of the fact that our world has a structure, in the simple fact that certain patterns of events — both human and nonhuman — keep repeating, and account, essentially, for much the greater part of the events which happen there.

—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건축가, 건축이론가), The Timeless Way of Building


음악을 건축에 비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나의 악곡에서 발견되는 수리적 비율과 구성, 어떠한 구조적 완결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이러한 메타포가 등장한다. 건축물은 공간에 고정된 구조를 제공한다. 그 구조를 물리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지구 중력을 비롯한 물리적 조건에 대한 이해, 공학적 지식, 구조의 필요와 효능, 미적 지향성 등이 적절히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인 지식과 기술자들의 실무적 노하우 등이 집약적으로 반영되어 하나의 건축물이 탄생한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설계도 위에 이상적으로 담긴 계획된 구조물과 그것의 구현 뿐만 아니라, 하나의 건축을 이루는 훨씬 더 유기적이고 맥락적인 구조, 즉 사회적, 문화적, 환경적 맥락까지 사유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모습으로 영원하지 않고 시간 속에서 변화 또는 풍화를 겪으며 하나의 생의 주기를 갖는 건축의 시간성을 인지하고, 또한 건축물이라는 구조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반복적인 삶의 행위와 사건들과 패턴 등과 유기적으로 관계하는 존재로써 이해하게 된 것이다.

범인류적으로 적용되는 공통의 구조는 자명하다. 바로 우주다. 우주의 우宇자는 무한한 공간을, 주宙자는 무한한 시간을 의미한다. 우주는 그 자체로 시공(time-space)인 동시에 시공이 우주의 구조인 것이다. 더 나아가 지구를 중심으로 지구를 포함한 천체의 자전과 공전 운동이 만들어내는 시공의 틀은 지구의 모든 존재들에게 동일하게 제공되고 적용된다. 1년 12달과 지구의 시공의 변화로 인한 계절 변화 등이 지구의 시공 운동에 의해 발생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구조인 것이다. 우주라는 ‘건축’은 고정되어 반복되며 운동하는 구조로써 존재하는 동시에 그 구조 안에서 발생하고 작용하는 삶의 다양한 모습과 변화가 어우러진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의 시공은 음운 운동이다.

음률(音律)은 시(時)라는 매듭을 짓고

운율(韻律)은 시(時)와 시(時)의 

음률이라는 매듭 사이의 시간속에 울리는 공간율이다.

음과 운은 입자(particle)와 파동(wave)이다.

— 배일동

The time-space of music is the movement of phonemes.

The rhythmically moving pitched notes (Eum-Ryul) tie the knot of time. T

he flowing rhythm (Un-Ryul) is the spatial movement that resonates in the time between one knot of time and another, which we call Eum-Ryul. Eum (pitch) and Un (the resonance of pitched sounds) are particles and waves.

— Il-Dong Bae


음악의 구조, 시공-음운

음악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 바탕은 우주의 시공(time-space), 즉 우주 그 자체다. 음악에서 시공은 각각 인간에게 유의미한 소리의 최소 단위인 음운의 차원에서 발견된다.

위 인용문의 첫 문장인 ‘음악의 시공은 음운 운동이다’는 여러 차원의 내용을 복합적으로 함의하고 있다. 첫째로 ‘음악에 시공이 있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음악은 시간적인 예술로 구분된다. 이는 음악은 소리로 표현되고 구현되는 예술로써, 음악이라는 예술의 주재료인 소리가 물질에 힘을 가해 운동을 발생시킴으로써 구체화되는 에너지적 경험이기에, 만질 수 없으며(intangible) 순간에 드러나고 또 ‘사라지는’ 속성으로 인해 타 분야의 예술에 비해 시간성이 두드러졌다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음악을 현상적으로만 살펴본다고 할지라도, ‘공간’적 요소 없이는 음악이 현실에 나타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물리적 진동을 일으킬 물체(악기)가 없다면 소리(힘, 운동)은 발생이 불가능하며, 향유자와 창작자의 물리적/공간적 있음(presence) 없이도 음악적 경험은 성립할 수 없다. 한 단계 나아가 물리적 현상의 이면에 내재된 소리의 구조와 원리를 살펴보면, 우주의 구조인 시공이 인류 언어의 차원에서는 음운이라는 구조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인이 경험하는 선형적인 시간은 대개 공간과 분리되어있다. 달력과 시계의 숫자가 바뀌는 것을 보고 시간의 변화를 추상적 정보(숫자)를 통해 이해하지만 이 시간이 공간적 변화의 반영임을 동시에 경험하거나 생각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지구의 시간(년, 월, 일, 시 등의 시간적 틀)은 천체라는 물질의 공간적 운동(이동)으로 인해 발생한다. 즉, 공간적 운동이 시간을 직조한다 말할 수 있다. 고대 동양에서는 하늘의 태양은 이지 이분(동지, 하지, 추분, 춘분)의 시간을 주관하고 지구의 땅은 상하-좌우-전후 육합의 공간을 주관하여 우주의 시공을 운영한다고 생각했다. 지구가 좌선左旋하여 돌아가면서 우행右行하는 해(북반구에서는 북쪽을 등지고 해의 남중고도를 관찰하게되는데, 남쪽을 바라보면 좌측이 동쪽이고 우측이 서쪽이며 이로써 해는 우행右行한다.)와 교차하면서 시공간을 형성하며 운동한다 본것이다. 이렇게 시공간이 태양과 지구(그리고 달)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는 이해는 ‘시時’자에서 발견된다. 옛 사람들은 글자를 통해 태양빛日이 지표면土에 닿으면서 구별寸되는 각 지점들을 ‘시時’라고 하여 시(time)를 물리적이고 구체적으로 정의했던 것이다. 시時는 태양빛과 지표면이 만나 부딪힌 두 에너지가 응집된 지점인 것이며 일종의 “매듭knot”이다. 그 매듭과 매듭 사이에 ‘공空’ 즉 공간(space)이 있는 것이다. 음운에서 음時은 시를 창조하고 운은 공空을 창조한다. 울리고 퍼지며 나타나는 공간적 율동감이 운율이고 공간적으로 확장되기 이전에 두 극이 부딪혀 응집된 새로운 뜻을 지니게 되는 그 지점을 음이라 하며, 음의 운동과 율동을 음률이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에서 유의미한 소리의 최소 단위라고 할 수 있는 음운은 수축되고 응집된 속성을 지닌 음과 팽창하고 퍼지는 속성을 지닌 운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현대 언어학에서 음운은 phoneme을 번역한 것인데, 음운과는 달리 phoneme이라는 단어 자체가 음운의 구조나 속성을 담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음운”과 “phoneme”은 같은 이해의 틀, 논리적 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나온 그 뜻이 완벽히 일치하는 개념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주-시공-음운 등으로 표현하는 한 존재(一)의 구조는 거시적 차원의 우주, 시공 구조가 인간 언어의 차원에 적용된 것으로, 대우주의 원리가 인류의 차원, 즉 소우주에도 매한가지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구성되어왔다.

음악의 음률과 운율 개념을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일반적으로 음률은 음의 높낮이가 두드러지는 곡의 흐름을 운율은 리듬의 율동감을 지칭한다. 즉, 음률은 멜로디melody와 운율은 리듬rhythm과 상호 등가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래 음률과 운율의 물리적인 실제 작용을 살펴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단순한 일대일의 적용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멜로디melody는 음률과 운율이 함께 적절히 어우러져 된 곡조라 정의할 수 있으며, 이를 구성하는 주요 기본적인 요소로 소리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음(pitch)와 소리의 길고 짧음(note duration)을 꼽을 수 있다. 소리의 길고 짧음의 다양한 조화로 나타나는 패턴과 율동감을 운율이라고 지칭하는 것이고 이를 리듬rhythm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음률을 음의 집단과 이에 따른 패턴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하기도 어렵고, 이는 운율도 마찬가지다. 이는 음률과 운율은 음(pitch)과 운(note duraction)의 집합체가 드러내는 어떤 고정된 패턴이 아니라 3차원적으로 운동하며 발생하는 힘에 의한 율동적 패턴이기 때문이다. 마치 시공이 수축하고 팽창하는 우주의 호흡과도 같다. 호흡의 형상은 시각적으로 나열된 정보가 아니다. 그렇다고 형체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호흡 운동의 원리에 따라 현상적으로 발현한 물리적 모습은 수리적, 기하적 표현이 가능하다. 즉, 도량형이 있다. 이렇게 구조를 이루는 이 모든 요소들은 상호작용하며 움직인다. 우주-시공 구조는 고정된 원리와 본질을 품은 동시에 끊임없이 운동하며 변화하는 속성을 지녔다. 모든 구조에 운동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지각할 때에 아무리 단단한 물질도 원자, 양자 등의 작은 단위의 차원에서 보면 원자, 핵자들이 지속적으로 운동, 진동하고 있는것과 마찬가지다.

한국 전통 음악은 우주의 구조인 시공time-space을 음악의 구조로 삼았다. 이는 형이상학적이거나 비유적으로 음악과 음악의 요소에 그러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뜻이 아니다. 아주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한국 음악의 장단은 달력 그 자체다. 24절기의 시간적 구분(24박)과 에너지적 변화를 담은 것이 진양조라고 한다면, 일년 열두달을 시간적 구분(12박)으로 하여 계절의 변화를 담은 것은 중모리다. 시공을 더 빠르게 돌려서 경험하면 시간 단위인 박의 수가 줄면서 한 장단이 더 빠르게 돌아간다. 자진모리는 더 잦게 4계절로 시공을 몰아가고 휘모리는 그보다 더 빠르게 일년 한 장단을 돈다. 이렇게 지구의 시공 변화를 수리적 틀과 형태적(도량형) 틀로 삼고, 마치 인류의 삶이 변화하는 시공에서 우주와 상호 작용하는 것과 같이, 사람의 운율과 음률의 노래가 지구의 시공의 틀에 사람의 운율과 음률을 어우러지게 하는 것으로 음악이란 인간 행위의 구조를 마련한 것이다. 자연의 구조에 의지하는 삶과 예술 행위가 아름답다.

생동하는 구조

우주의 구조인 시공은 살아있다. 구조가 품은 운동성을 의미하며 이 운동성은 존재가 변화에 열려 있음을 뜻한다. 변화에 열려있음이 곧 살아있음이다. 살아있는 것들에는 죽음에 이른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존재의 생멸의 사이클을 갖추고 있다. 살아있는 구조는 변화하지만, 이 구조를 이루는 중심적 내용과 원리 자체의 속성은 변화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에 있는 구조에는 그 만의 중심이 있다. 이는 물리적인 형태에서 나타나는 무게중심이나 회전축 등의 중심 뿐만 아니라 각자의 정체성을 이루는 이상수理象數를 의미한다. 모든 인간 및 비인간, 혹은 우주 만물과 인류의 각자를 자신의 이상수를 지닌 각 주체로 말할 수 있다. 각 주체에는 이상수理象數가 있으며 그 이상수가 현실세계에 드러날 때에 그 본질에 맞는 구조인 도량형度量衡을 지니게 된다. 개체의 본질과 형태는 상호적으로 전존재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본질적 내용이 현실적 형태를 갖추는 것이지, 현실적 형태의 수리적 내용과 형식이 존재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 및 비인간에게 모두 발견되는 구조는 복잡한 인간의 문화적, 심리적, 사회적 행위들과 자연과 문화적 바탕들을 제거한 채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주입하게 되면서 본래 자연으로써의 인간 본성과 자연 자체와 멀어지고, 조화를 잃으면 ‘불편해’ 지게 된다. 반대로 자연적인 구조화 방식을 택한 인류는 자신이 놓인 환경과 문화적인 논법에 의거하고 의지하며, 각자의 본성에서 발현되는 요구에 따라 이를 구조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그것이 건축적 구조로 나타나면 건축이고 음악으로 나타나면 음악적 구조가 된다. “객관적, 합리적”으로 이상적 구조가 자연 본성과 우주적 환경의 실재적 맥락에 벗어나 구조화되어 자연환경이나 사람의 환경에, 또한 심리적 환경에 ‘이식’이 되는 것은 결코 조화로운 아름다움에 이르렀다 할 수 없다. 현대에 야기된 많은 심리적, 정신적인 문제들은 이러한 자연으로서의 인간 본성과 자연 그 자체가 온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면서 일어난다고 본다. 우주 자연에서 주어진 구조에 의지하기 보다는, 우주와 자연의 구조와 율동과 동떨어진 인위적인 형식이 사람들의 삶에 이식되는 것은 인류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것과 같다.

오늘날 인류는 각자가 처한 처지에 따라서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구조를 자신의 삶에 이식하도록 강요받는 위치에 놓이곤 한다. 루소가 비판한 사회의 비인간성, 노자와 장자의 인위에 대한 비판적 관점 등, 과거에도 현재에도 어떠한 시스템이 초기에 만든 주체자를 벗어나서 그 자체로써 힘을 발휘할 때에 더욱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음악교육에서도 이론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음악적 구조의 수리적 논리만을 다루거나, 연주에 있어서는 원리와 본질이 아닌 형식적 모방에 집중되어 있다 볼 수 있다. 이러한 교육 환경에서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조화를 이루는 음악예술가를 적절히 길러내기 어렵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연으로써의 인간됨에 닿아있도록 돕는 음악, 건축 등의 모든 구조들이 더욱더 필요한 때다. 또한 자연으로써의 인간됨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 심화되는 환경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데에 밑거름이 될 의식의 전환의 첫 단추가 될 것이다.

Previous
Previous

10 Harmony -1

Next
Next

08 소리의 존재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