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소리의 존재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리(성聲 또는 sound)와 음악적 소리인 음音은 구분되어 각기 다른 위상을 갖아왔다.
물론 소리sounds는 음악적 소리와 소음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음악들을 발생하게 한 그 이론적 문화적 사상적 체계에서는 과하게 말하면 ‘음’이 아닌 소리는 음악이 될 수 없었다. 소리 중에서도 그러한 음악성을 가장 갖추지 못한 비정형적이고 (또는 그렇게 보이고), (서양에서 발생한 근대적) 세계관에 예속된 미감, 미의식 또는 미학적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소리를 소음nois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소음은 ‘비논리’적이고 ’추하다‘.
이렇게 유럽전통음악에서는 그 위계가 매우 분명하여 ‘음’으로 규정된 범위를 벗어난 청각적 발현과 경험으로써의 모든 소리를 음악의 범주에서 탈락시켰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존에 구축된 기능 화성학이 어떤 의미에서 그 발달의 끝에 이르렀기에 기존 음악의 수리적 논리체계를 벗어난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음악적 소리의 범주를 넓히고, 이 전에 비음악적 소리로 여겨진 요소들을 음악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여기에는 단지 완전히 새로움을 실험하는 방법 뿐만 아니라, 타문화의 음악적 특징을 차용하기도 했다.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에 동질적이고 균일하지 않아 부드럽게 블렌드되는 합주가 되기 보다는 악기의 개성적 특질이 뚜렷하게 나타났던 시대 악기period instruments에 대한 연구도 이어졌는데, 물론 이것이 고증적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지라도 새로운 사운드 경험을 불러일으키며 이후 악기 개량을 통해 제거되었던 ‘소음’이 질감적 특색으로 다시 받아들여지는 일임은 분명해 보인다.
다양한 음악적 소리를 수용하는 역사에서 이론적으로 볼때에 가장 보수적인 접근은 ‘음과 음 사이의 소리’를 규정하는 행위다. 이 역시 20세기 서구권의 음악가들이 중동, 인도 등의 비유럽의 전통음악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평균율 12음계 사이의 음들을 관찰하게 되었고 이를 ‘미분음microtones’으로 이론화시킨다. 이는 여전히 음과 음악의 근대적인 합리적 논리로써의 음악을 음악인 것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기존의 논리적 틀을 더욱 심화함으로써 기존에 포함되지 못한 소리의 존재가 음악적으로 ‘있음’으로 취급하게 된 것이다 (근대적 ‘비합리’에 해당하는 모든 존재는 ‘비존재’로 취급한 바, 이는 비단 음악 자체 내에서만 일어난 소외가 아니라 사회-문화-정치적으로 두루 가해져온 식민주의적 폭력이었다). 이러한 ‘미분음’이라는 설정을 통한 ‘음과 음 사이의 소리’에 대한 수용은 유럽의 전통음악의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분명 음악적 지성의 ‘발달’이지만 본격적인 패러다임 전환은 아니다. 또한 타문화의 음악에서 관찰된 소리의 (유럽인 관점에서) 모호성을 합리화한 유럽적인 ‘해석’일 뿐 이 소리의 본래의 논리체계를 이해하고 수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비교적 진취적인 접근은 ‘소음noise’으로 여겨지는 모든 소리를 음악에 또한 음악적 경험의 영역에 끌어오는 것이다. 이는 음악분야 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존 케이지의 4’ 33’’, “깊이 듣기 Deep Listening”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현현하는 소리의 경험을 명상적인 태도로 수용하도록 유도하는 철학을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창작 활동했던 실험음악, 전자음악 작곡가이자 연주자 폴린 올리베로스Pauline Oliveros의 작업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음악가 모두 동시대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음악과 음악적 경험을 ‘미학적으로 유의미한 청각적 경험’이라 정의한다면 미학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던 각종 ‘소음’을 유의미한 청각적 경험을 제공할 대상으로 제안한 작곡가 머레이 셰퍼 R. Murray Schafer의 사운드워크soundwalks, 사운드스케이프soundcape 개념도 주목할 만하다. 셰퍼는 모든 소리가 음악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논리와 무의미의 소리(노이즈)였던 모든 청각적 경험을 인간의 인지와 인식에 포함시키도록 했다. 예술작품으로써의 구조화된 음악의 소재로써 활용될 수도 있고, 일반적인 청각 환경을 조금 더 의식적이고 세심하게 조성하고 또 그 사회문화적인 비무형적 가치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의 음악 장르로 정착한 노이즈 음악도 이러한 예들 중 하나다. 비전통적인 소리, 불협화음 및 비멜로디적 요소를 포함하며 음색, 음향 및 음의 원시적인 음향 특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이 지점에서 진취적인 작곡가들은 한국 전통음악의 현대(contemporary)성을 발견하곤 한다.). 이 장르는 전자 피드백 및 왜곡distortion부터 비전통적인 악기 사용까지 다양한 음향 가능성을 탐구한다.
성聲과 음音
동양에서도 성음聲音, 즉 소리와 음악적 음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다. <악기>에서는 성, 음, 악에 수직적인 위계를 부여하며 명확하게 구분했다. 소리가 곡조를 이루는 것을 ‘음’이라 하고 이를 “가지런히”하여 악기로 연주하고 무용이 더해진 것을 ‘악’이 된다고 했다. 악은 가사, 형식, 무용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형식적으로 더욱 갖추어 완성된 것으로써 성이나 음보다 성숙한 형태로 보았다. 성은 태초에 발현된 음악의 원형적인 상태와 그 뿌리가 되는 뜻과 감정, 음은 성이 구조를 갖추고 더욱 노래나 곡조의 형태로 나타난 것, 악은 더욱 형식을 갖춘 공연의 성격을 갖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군자君子만이 ‘악樂’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며 ‘성’에 머무는 것을 금수禽獸와 같은 것이라 규정하는 등 다소 도그마적인 시각을 보이는 듯 하지만, 사실 이는 뜻(성)과 형식(악)의 조화가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시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시라는 것은 뜻이 가는 바이니, 마음에 있을 때에는 뜻이라 하고 말로 드러내면 시라 하는 것이다. 정이 마음 속에서 움직이게 되면 말로 나타나는데, 말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차탄을 하게 되고 차탄해도 부족하기 때문에 길게 노래하게 되고, 길게 노래해도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너울거리고 발을 구르게 되는 것이다. 감정이 소리에 의해 표현되고, 소리가 조화된 곡조를 이루는 것을 음악이라고 한다.
마음에 일어나는 뜻을 사람은 말로 표현하는데 말로 부족하면 말이 길게 늘어져 탄식이 되고, 그 탄식이 곡조가 되다가 나아가 몸의 움직임인 춤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시경>과 <악기> 등의 고문古文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이 있다. 바로 청각적으로 표현하는 인간의 활동의 뿌리를 객관적 세계와 조응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그 조응으로 인하여 사람의 소리 즉, 성聲이 발동, 발현한다는 것이다. 이 ‘조응’의 구체적인 성질과 원리에 대한 통찰은 한퇴지의 <송맹도야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大凡物不得其平則鳴 대범물부득기평즉명
이는 무릇 만물은 자신의 안정을 잃으면 소리를 낸다는 뜻이다. 이어서 만물의 소리의 근원에 대해 말한다. 안정된 상태의 풀, 나무, 바람, 물 등은 소리가 없지만 이들을 바람이 흔들거나, 불어대거나, (물의 경우) 돌에 부딪히거나 막히거나 끓거나 두드림으로써 ‘불평不平’ 즉, 안정된 상태를 벗어날 때에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내는 소리인 말과 음악도 마찬가지로 “부득不得 즉 만족함이 없어 말을하고, 그리움이 있어(有思) 노래를 하며, 회포가 있어 우는 등 마음이 불평不平하기 때문에 소리를 낸다”고 했다. 악樂(음악)은 소리를 잘 내는 사물을 통해서 사람이 자신의 가슴 속에 쌓인 것들을 밖으로 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종합해보면, 옛 사람들은 관찰되는 자연만물의 물리적 이치, 사람의 마음의 작용인 심리적 이치, 그것이 소리로 발현되어 나타나는 예술의 이치와 그 근원을 물리적 균형이 깨진 상태인 평평하지 않음 즉, ‘불평’에서 찾았다. 현대의 일반적인 용례로써의 불평complaint이란 단어는 마음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이로 인한 말이나 행동을 뜻한다. 이러한 현대적 의미를 포함하여 ‘평’과 ‘불평’의 더욱 원형적인 의미를 살핀다면 이는 분명 양극단의 균형에 관한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양극의 두 힘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는 반드시 운동을 일으킨다. 공기의 대류는 고기압과 저기압의 상대적 차이로 인한 것이며, 물의 대류는 수온의 차이로 비롯된다. 또한 흘러가는 물이 그 관성을 유지하며 한 방향으로 나아가다가도 중간에 돌을 만나 부딪히면 물의 방향은 바뀌고 물보라가 일고 세찬 파열음이 생긴다. 양 끝에 고정된 악기의 줄이 그 평평함을 유지하며 잠잠히 있다가도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줄을 흔드는 순간 줄은 진동하며 소리를 낸다. 사람이 배가 고픔을 느끼면 배를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나타나고 행동한다. 고요한 마음은 고요한 호수와 같아서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자족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잃으면 그 존재의 크기만큼 큰 슬픔으로 크게 울게되는 것이다. 이 모든 예가 각각 우주의 서로 다른 차원에서 공통적인 원리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단지 문학적인 수사修辭나 메타포가 아니라, 거시적 세계(대우주)에 적용되는 법칙이 미사적 세계(소우주)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동양 사상의 대전제에 기반한 논리인 것이다.
사운드(소리)나 노이즈(소음), 또 음악적 음에 대한 서구의 음악학적 논의는 성음악에 대한 동양의 담론과는 다르게 소리라는 물리적 현상 이면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고찰은 동양적 전통과는 달리 여전히 논외에 있다. 다시말해, 현상적으로 나타나 진동하는 소리에 관한 것이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소리와 음 이면에 존재하는 발원지나 동기까지 포함하지 않는다. 즉, 왜, 어떻게 소리가 나고, 그 소리를 내는 주체의 동기가 무엇이며, 그 소리를 통하여 음과 악을 이루고자 하는 인류의 행위에 대한 고찰과 소리sounds와 음notes이라는 말과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미 언어적으로도 사운드, 노이즈, 음악의 음(note, tone, etc)이 지칭하는 바가 그 소리의 현상적 단면 만을 그 범주에 두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성’이란 단어/글자는 언어적인 소리(말)와 관련된 맥락에서 주로 쓰이고, 말이 발전한 형태로써의 노래의 의미도 갖고 있다. 즉, 소리를 만들어내는 주체인 사람이 ‘소리(성)’과 분리되지 않은 채, 체와 용의 양면이 소리의 개념을 이루는 것이다. 소리聲와 음音은 현상으로 나타나는 소리와 음의 근본을 행위와 향유의 주체인 인간 정신과 몸에서 부터 찾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오음五音인 “궁,상,각,치,우”도 특정 음가音價로 대변되는 음들이 배열된 일련의 오음 음계(pentatonic scale)로 나타나기 이전, 오행이 소리로 드러난 각 성질을 갖추고 그것이 이루는 조화를 말한다.
그러므로 서양적 또는 현대적인 인식과는 달리 옛 동양적 관점에서는 음악의 형식적 완성만으로는 결코 성음악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며, 음악의 형식적 변화와 혁신 자체를 ‘발전’이나 ‘성숙함’으로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특정 시대의 양식(형식)과 시대 패러다임이 전복되고 새로 형성되는 과정이 일련의 음악 ‘발달’의 역사를 이루는 서양과는 달리 한국 음악은 애초에 역사관이 달랐고 음악을 통해 닿고자 한 궁극도 달랐다. 예컨대 국악에서 ‘성음’은 연주자의 기술적 탁월함을 넘어서 연주자 고유의 결, 또 삶의 애환이 깊이 느껴질 정도로 잘 곰삭은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표현할 때 주로 쓰는 단어다. 이러한 깊은 소리는 농현의 기교보다도 더 원초적인 소리의 특질에서 느낄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청초하고 맑기만 한 소리나 화려한 기교로 색채감이 있는 소리가 아니라 소리의 상하, 청탁, 강유, 원근 등의 오고감이 자유로워 소리와 음의 단초가 되는 본래 내용을 실재감 있게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음악적인 형식미(악), 음악적 소리의 질서(음), 소리의 뿌리가 되는 뜻과 감정(성)의 조화를 가치롭게 여기며, 근본이 없이 형식에만 치우친 음악을 미성숙하고 온전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음을 뜻한다. 껍데기 뿐인 소리는 제 아무리 형식적으로 완성도가 높더라도 궁극적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럽의 음악이 형식미에 치우쳐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평균율이 널리 보급되고 오선보 기보법이 음의 높낮이와 길이를 모두 정량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고, 또한 수리적이고 객관적인 음을 조합하는 법칙을 이론화하기 시작한 때부터 급속히 일어났다.18세기, 스스로도 음악에 매우 열정을 가졌던 철학자 루소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당시 음악의 ‘과학적 발전’의 선두에 있던 작곡가이자 음악이론가인 라모를 크게 비판했다. 루소 또한 동양의 옛 사람들과 같이 소리의 기원을 사람에 마음에서 일어난 감정과 생각(정념)에서 찾았으며, 이러한 사람의 정념이라는 소리의 근원을 무시하고 오직 기술적으로만 소리(음)을 조합한 음악을 그 본성에서 벗어난 것으로 본 것이다.
최초의 분절음(조음)이나 최초의 소리는 이 사람들이나 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정념의 유형에 따라서 최초의 목소리로 형성되었다. 분노하면 혀와 입천장으로 조음 되는 위협적인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정감 어린 음성은 더 부드러운데, 이것은 성문이 음성 변화를 시키고, 이 음성이 소리로 되기 때문이다. 다만 감정이 거기에 개입되는 것에 따라, 강세가 더 빈번하거나 더 드물게 나타나고, 억양이 다소 높아지기도 한다. 이렇게 운율과 소리는 음절과 함께 생겨난다. 정념으로 모든 기관이 움직이게 되며, 목소리는 모든 기관의 빛으로 장식된다. 따라서 운문, 노래, 말은 기원이 공통적이다.
언어의 기원, 장-자크 루소, 한문희 옮김, 한국문화사
루소는 사람의 정념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원초적인 생기를 지닌 사람의 소리로써의 말과 음악이 문화적 변화를 겪으면서 같은 뿌리를 벗어나고, 음악은 “새로운 법칙(당시에 발달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어지는 화성학)”에 지배받기 시작하면서 본래의 생기를 잃었다고 말한다. 공기 압과 줄의 진동 등의 순수하게 물리적인 현상으로만 소리의 효능가치를 환원(reduction)시키는 당대의 많은 음악가들은 오히려 음악의 근원과 원초적인 힘으로 부터 더욱더 멀어지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또한 “삼단화음을 어떻게 쌓아 코드를 만드는 것이 도대체 마음의 감정과 생각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얼마나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정념에서 나온 사람의 소리(성)가 조음의 구체적인 체계(분절된 음운으로 말, 단어 등이 구분되기 시작함)를 통하여 더욱 갖춰진 형태의 말과 언어가 되고, 정념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 본래의 도량형과 생기를 음률을 통해 드러내었던 태초의 음악이 점차 근원에서 멀어졌다는 것이 18세기 당시 루소의 통찰이었다.
비록 서양음악은 루소가 생각하는 음악과 소리의 본질에서 벗어나 발달하였고, 현재 거시적으로 보면 서구문명의 세계관과 음악관이 전 세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고도로 발달하여 물리적인 풍요가 넘처나는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는 다시금 사람의 본질과 본성에 대한 목마름이 더욱 더 강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의 음악-창작가들이 끝없이 형식적 변화와 혁신을 시도하며여 그 어떠한 새롭거나 그렇지 않은 양식의 음악을 창작-연주하더라도, 다시금 소리 존재의 체용을 전체론적(holistically)으로 두루 이해하며, 소리의 근본을 인간 본성에서 찾을 때에서 비로소 각자의 궁극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