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박拍 -2

수축한 점과 펼쳐진 공간으로써의 박拍

앞서 살펴본대로 음악의 박拍은 ‘재방변 수手’가 나타내는 ‘치다’라는 의미와 반복되는 타격 간에 팽창하고 수축하는 파동, 빈 공간을 그려내고 또 글자 ‘박’의 소리가 되는 ‘백白’으로 이뤄져 있다. 두 손이 마주하여 서로 부딪치고 멀어지기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물리적 모습을 나타내는 글자로 음악의 ‘박’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유럽 음악 전통으로 발달한 개념인 ‘beat’과 그 번역어로써의 ‘박’은 본래 ‘박拍’이라는 글자에 담긴 의미의 전체를 담아내기보다는 일면(一面)만을 이야기함을 이전 글에서 밝힌 바 있다.

박拍은 글자 자체에 그 부딪힘과 더불어 생기는 ‘운韻’, 즉, 두 손이 벌어지며 팽창하며 생기는 공간 또는 짧은 부딪힘에 의해 생겨나는 긴 소리의 파동/파장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 비트의 경우 그 어원을 살펴보면 ‘치다’라는 일면적인 뜻 이외의 더해진 다른 의미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비트Beat의 어원인 중세 영어 "beten"과 고대 영어 "bēatan" 또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타격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오늘날에도 무언가를 반복해서 치거나 때리는 원래의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를 패배시킨다’라던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예:‘I’m beat’)’로 여러가지 확장된 의미를 갖게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반복적으로 타격하다’에서 파생된 것이고, 음악에서 쓰이는 ‘beat’도 마찬가지로 단어의 일반적인 뜻을 그대로 음악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순환하는 시간

박拍은 음악적 시간의 눈금, ‘시時’다.

우리의 시간은 여기서 저기로 갔다가 저기서 여기로 돌아온다.

박拍이든 비트beat이든 모두 균일하게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충돌로써 음악의 시간을 측량할 수 있는 눈금 역할을 한다.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박은 (일반적인 음악 교육을 통해 경험되고 인지되는 것과 같이) 수직선 상에서 무한대로 직진하며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또는 제자리에서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는 단일 사건들의 집합도 아니다. 개별적인 하나의 ‘박拍’이 시작-과정-결과라는 사이클을 이루는 동시에 일련의 박들의 집합은 특유의 율동으로 하나의 더 큰 단위인 ‘박拍’으로 순환한다. 이렇게 특유의 패턴으로 순환하면서 반복하는 박의 집합을 수량적으로 표시하는 유럽 전통 음악에서 발달한 것이 바로 ‘박자 meter’다. 박자의 수량적 표시는 ‘박자표 time signature’로, 박자의 한 구간을 나타내는 ‘마디 measure’는 오선을 가로질러 수직으로 떨어지는 짧은 선들인 마디선 bar line, measure line)으로 나타낸다. 모든 마디의 기본 패턴 — 4분의 4박자의 강세인 ‘강-약-중강-약’, 8분의 6박자 ‘강-약-약-중강-약-약’과 같은 —은 새로운 마디가 시작될 때마다 반복된다.

시간의 순환성은 상징이나 형이상학적 내용이 아니라 지극히 물리적인 현상, 실상이며 우리의 현실이다. 낮이 되고 밤이 되다 새 날이 오고, 올해의 봄이 지나 한 해가 지나면 다음 봄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순환은 단순히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다. 같은 아침이지만 어제의 아침과 오늘의 아침이 다르고, 올해의 봄과 내년의 봄도 다르다. 이렇게 지구의 자전으로 날(day)이라는 박拍이 생기고 공전으로 해(year)라는 박拍이 생긴다. 지구 및 천체 덩어리들이 서로 밀고 당기며,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는 동시에 서로를 돌면서 크고 작은 박拍이라는 눈금을 내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시간에 단위를 만들어 준다. 지구에서 경험하는 시간의 마디는 철저히 실체있는 물리적 운동을 통하여 형성되었으며, 지각하든 그렇지 않든 지구에 사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다.

한국 전통음악의 시간은 이러한 순환하는 사이클을 지닌 자연의 ‘박拍’을 그대로 본따 그 틀을 갖췄다. 즉, 일 년이라는 시간적 단위와 그 일 년 안에 일어나는 만물의 변화를 담아내는 장단은 24절기를 나타내는 24박 장단 (진양조), 12달의 12박 장단(중모리), 사계절의 4박 장단 (자진모리) 등으로 설계되어 있다. 각 장단은 기본적으로 박의 수가 많을 수록 느리고 박의 수가 적을 수록 빠른데, 느린 장단일 수록 일 년의 변화를 세세하고 자세하게, 빠른 장단은 그 모든 일년 안의 변화의 흐름을 압축해서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중모리의 12박에서 각 하나의 박이 한 달을 나타내는데, 이에 비추어 4박 장단인 자진모리는 1월부터 4월까지의 네 달만을 하나의 사이클로 가져가는 것이 아닌 한 계절을 한 박으로 하는 것이다. 즉, 시간의 축척, 비율이 달라지는 것이다.

비엔나에서 태어난 빅토르 주커칸들에 의하면 서양음악에서 일반적으로 박자에 관해 말할 때에 시간을 상징하는 일반적인 도식은 무한대로 뻗어가는 수평선이다. 그 직선을 균등하게 나누는 눈금들이 박을 나타냄으로써 표현한다.

박자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시간의 흐름을 나누는 것, 즉 균등하게 분배된 시간 표시, 시간을 동일 단위로 나누는 규칙적인 박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의 시각적 상징은 전체를 똑같은 길이로 자르는 표시를 한 직선이다. (…) 우리는 앞서 일반적인 조건에서라면 규칙적인 박은 여러 그룹으로 조직된 것으로 경험되리라는 것을 관찰한 바 있다. 그 경험은 우리가 박자를 세는 데서 분명해진다. 즉, 둘, 셋, 넷, 아니 그많은 숫자를 붙여 세고 난 후에는, 다시 ‘하나’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다시말해서 우리는 전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한편 계속 되돌아온다.”

빅토르 주커칸들, 음악이란 무엇인가 (원제: The Sense of Music)

처음에서 출발하였다 다시 돌아오고 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 그리고 음악적 시간의 순환성은 한국의 장단 및 세계의 다양한 문화권의 음악에서 뿐만 아니라 서양 음악의 박자 개념에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다만, 서양의 음악이론은 물리적 실체(이상수)에서 분리된 추상적인 수를 통해 음악의 기계적 구조를 파악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고, 그런 접근으로 정립된 오늘날의 서양 음악 이론 자체에서, 음악적 시간에 담긴 지구과학적 현실과 실상을 발견해내긴 어려워보인다. 그럼에도 주커칸들은 직선적 시간으로 그려지는 박을 표현하는 도식이 경험적으로 인식하는 박자와 ‘모순된다’라고 하며, 이론적 이해와 자연스럽게 형성된 음악적 경험과 인지되는 현실이 다르다는 점을 통찰했다. 서양 음악의 박 또한 “전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되돌아온다.”

순환의 본질적 운동작용

위에서 시간의 “순환성”을 논했지만, 이 말을 이해할 때에 주의할 점이 있다. ‘박拍’에서 ‘순환’은 현상적 모습을 설명하는 표현이므로 ‘박’ 자체의 본질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이 현상이 있게하는 이면의 본질, 다시 말해 왜 어떻게 순환하는 모습이 나오는가를 살펴서, 해당 원리와 원동력이 ‘순환적 모습’을 이끌어 낸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모든 형상은 그 형상이 있게 하는 내재적인 운동 원리가 있기 마련이다. 빨간 자동차가 우리 눈에는 같은 빨간색으로 정지된 하나의 상태이며 고정된 하나의 색으로 보이겠지만, 이 빨간색으로 보이는 물질을 이루는 원자들이 진동하는 방식과 구조가 빛의 일부를 흡수하고 반사하는 운동과정에서 생겨나는 현상인 것이다. 여기서 튕겨져 나오는 빛이 우리 눈에 빨갛게 보이는 주파수인 빛 파장이며, 그것이 우리 시신경으로 이동하고 닿게 되며 뇌를 통해 빨간색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원심력과 구심력의 작용으로 ‘순환하는’ 천체의 궤도가 그려지는 것이지, 궤도 자체는 운동 원리가 아니다. 이와 같이 내재적 운동 원리를 통해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적 표현으로써 ‘순환’을 이야기 한 것이지, 순환 자체가 박을 나타내는 구조의 본질이라는 뜻으로 논한 것은 아니다.

한 점에서 출발하여 원을 그린다고 상상해보자. 원을 종이 위에 그려내는 연필심의 끝을 따라가며 전진하며 이동하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을 순차적으로 경험한다고 하자. 이는 마치 주커칸들이 박을 경험하는 시퀀스를 관찰함으로써 음악적 시간이 순환함을 지각하게 된 것과 같다. 이번에는 원을 종이에 그리기 위해 한 점과 다른 한 점이 대치하는 상태를 설정해보자. 컴퍼스라는 도구가 없다면 아마도 지지 할 수 있는 연필이나 막대기 두 개를 실로 묶어서 반지름을 설정하여 그리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두 막대기 혹은 두 연필의 가장 밑 부분은 그 뾰족한 끝이 바닥면 또는 종이 위에 굳게 꽂혀있고 두 연필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실은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를 유지해야만 할 것이다. 두 연필은 원심력을 작용하는 동시에 구심력을 적절히 작용해야만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원운동을 할 수 있다. 두 연필은 서로 밀고 당긴다. 이 두 힘의 작용으로 ‘인하여’ 원이 그려지는 것이다. 한쪽은 붙들어 잡고(구심력) 다른 한쪽이 튕겨져 나가는 듯(원심력)이 보이지만 이는 모두 상대적인 관점으로 보아야하고 결국에는 쌍방의 힘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이다. 한쪽이 튕겨나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반대쪽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붙들어 당기는 구심력이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다만, 경중과 강유의 차이는 존재하여, 한쪽이 강체(rigid body)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크고 작은 원운동이 생기는 것이다. ‘박(혹은 박자)’와 ‘장단’의 순환성의 그 본질(체)은 원심력-구심력의 작용이며 이에 의해 발생하는 원운동이 만드는 기하학적 형상이 바로 이 순환성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상호작용하는 천체 운동을 관찰하여 이를 우리 시간의 틀로 삼았다. 또한 그러한 우주적 운동원리를 시간의 본질로 이해했다. 달력 등 시간의 구분은 물론이거니와 음악의 시적 눈금인 박도 이러한 우주적 본질을 바탕으로 그 중모리, 자진모리 등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시간적 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순환의 본질적 운동 작용은 우주적 차원의 ‘박拍’인 ‘시時’를 살펴봄으로써 한층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자이로스코픽 세차운동 (세차운동)
박자와 장단의 한 사이클에도 ‘갔다가 되돌아오는’ 원운동을 이끄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작용하지만, 개별 박도 마찬가지의 운동이 일어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우주의 모든 곳에 적용되는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겠지만, 애초에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던 흐르지 않던 지구 특정의 시간으로, 시의 정의와 단위화한 시간은 명쾌하고 명확하며 지극히 현실적이다. 지구, 해, 달의 자전과 공전 운동에 의해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한 지점을 기준으로 해의 각도는 끊임없이 변한다. 하루 주기로 또 일년 주기로 변한다. 남향으로 서있는 사람의 시점에서 동쪽에서 뜨는 해는 지면과 각도를 점점 더 크게 하여 정오가 되면 직각을 이루며 그 특정 지구표면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일조량을 받게되는 한낮이 된다. 해가 서쪽으로 지면서 지표면과 해의 각도는 점점 좁아지고 일조량이 줄어들면서 밤이 된다. 한편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는 세차운동을 하여 태양을 돌면서 자전축의 각도에 변화가 생긴다. 즉 남중고도가 높거나 낮게 되는데,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 겨울에는 지표면에 바라보는 태양의 높이가 낮으므로 태양의 길(황도)의 각도가 지표면과 낮아 하루의 일조량이 매우 줄고, 여름에는 남중고도가 높아 하루 동안 해가 비추는 양이 는다. 적도부근은 남중고도가 일년내내 비슷하여 계절도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태양의 빛이 지구에 긋는 마디 선들이 지구의 ‘때’가 되는 것이고 그 마디와 마디 사이의 구간들이 시간인 것이다. 시時 글자 자체가 이러한 물리적인 작용을 직접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시時와 박拍

는 지구의 때이고 박은 음악의 시時다. 태양日과 땅土의 두 요소의 작용으로 정의한 ‘시’와 마주하는 두 손扌작용으로 정의한 ‘박’은 그 물리적 원리가 동일하지만 다른 차원에 속하는 요소들로 나타낸 것이다. ‘시’가 태양과 지구 천체의 상호작용이 그리는 마디라면 ‘박’은 사람의 두 손이 상호작용하며 그리는 시공간 마디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시時와 시간時間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하지는 않는 듯하다. 원래 ‘시간’은 시와 시의 간격, 폭, 구간을 뜻하는 말이고, 시는 이와 달리 한 순간이라는 시간의 지점으로써의 때를 뜻한다. 해를 뜻하는 ‘일日’, 땅과 흙을 뜻하는 ‘토土’, 그리고 마디를 뜻하는 ‘촌寸’, 이 세 글자가 결합하여 ‘시時’자를 형성한다. 태양광日이 지구 표면土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그려내며 빛과 땅이 충돌하는 접점에서 바로 하나의 때/시가 나온다는 뜻이다. 태양 빛과 지구 땅이 만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닿음’인 것인데 이를 통하여 시時에 구간이 생기고 구분(寸)이 생기는 것이다. 다시말해 태양 빛(양, 원)이 지구의 땅(음, 방)이 타격하는 지점으로 생기는 마디寸(승부, 각)가 바로 ‘시時’라는 뜻인 것이다. 마디 촌자 자체가 경도선(세로선)과 위도선(가로선)이 나타내는 지구 표면의 한 장소에 태양광선 한줄기의 끝이 꽂히듯이 (점)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시時자 자체에서 태양과 지구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나타나는 마디를 ‘시’로 정의했음을 알 수 있다. 

시時가 지구의 박拍이라면, 박拍은 음악적 시간의 눈금, 시時다. 물론 다른 모든 개념이 그러하듯 ‘시’도 ‘박’도 공간성을 내포하고는 있다. 박에도 빈 공간을 뜻하는 백白자가 있고, 음운에는 ‘운韻’있다. 공간에서 ‘박’이 펼쳐지고 공간에서 ‘음’이 실체를 드러낸다. 모든 유의미한 소리의 기본 단위로써의 음운은 또한 말 자체에 그 기본 구조를 담고있다. 음운의 ‘음’은 짧고 강한 자음으로 ‘뜻’인 소리의 씨앗이고, ‘운’은 뜻이 펼쳐지면서 정서적 ‘맛’과 정경이 드러나는 길고 (넓고) 유한 소리의 공간, 씨앗이 심기어 자라나는 대지와 같은 모음이다. 뿐만 아니라 ‘음’은 ‘시’를 나타내기도 한다. ‘시’는 태양빛이라는 씨앗이 지구 땅에 부딪혀 내는 마디다. 음도 시도 모두 한 구간의 시작이 되는 충돌 지점이다.

소리 자체가 시공간을 품었고, 박 또한 시공간을 품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공간을 품은 ‘박’은 단순히 음악의 시간을 재고 눈금을 세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시(때)를 통하여 특정 (시)공간으로 펼쳐지는 문이 되는 것이다.

베틀의 날줄과 씨줄: 날줄을 먼저 상하(북남)로 걸어 기준을 잡고 그 위를 좌우(서남)로 가로질러 씨줄이 수직으로 교차하여 직물을 짠다.

사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음악에서는 으레 음의 높낮이와 음의 길이를 분리 가능한 요소로 보고 분석한다. 이는 추상적인 생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재 그 둘이 분리 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직물을 만드는데 세로로 늘어진 실만으로는 직물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로로 길게 늘어진 실(날줄, 날실)을 좌우로 가로지르면서 오가는 실(씨줄, 씨실)이 있어야 엮음이 생기며 직조된다. 우주宇宙가 시時라는 날줄과 공空이라는 씨줄을 엮어서 지은 만물의 집이라면, 음악에서 소리는 음의 높낮이(pitch)와 음의 길이(note duration/value)가 언제가 맞물려있는 상태로 완성된 존재가 된다.

마찬가지로 ‘박’을 논할때 주로 서양적 관점에서는 이를 음의 시간적 길이에 관한 것으로 보지만, 하나의 박이 물리적으로 충돌을 통해 파장의 형태로 공간에 ‘우는 (천이나 벽지 등이 “운다”라고 할때와 같이)’ ‘울리는’ 것 극단적으로 말하면 공간 자체가 우는 것을 전제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항상 주목해야한다. 다시말하면, 박은 시간적 눈금이며 이로 인해 음악적 시간, 시와 시 사이의 구간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지만 더 길게는 이 작용이 공간에 관한 것이다. 공간에서 퍼지고 펼쳐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이 음악적 시간의 눈금으로써 부딪힘을 반복할 때에 이 부딪힘이 열어주는 공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아야만 박의 총체적인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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