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율려와 음계
12율려와 12음계는 모두 소리의 물리에 입각하여 동서양에서 동일하게 ‘발견’,’ 발명’ 혹은 ‘발달’한 음의 체계다. 12율려는 중국 한대에 체계화되었다고 전해지며 서양의 음계에 관한 수리적 바탕은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알려졌다. 고대 그리스 문화와 사상은 서양(유럽)의 문명사 속에서 끊임없는 영감과 귀감이 되어 큰 영향을 주었으나, 고대 그리스 음악의 실체는 전해지지 않았고 상상할 수 있을 뿐 정확히 알 수 없다. 서양 음악의 우리가 아는 평균율(equal temperament)이라는 체계는 몇 세기에 걸쳐 발전해 왔으며 건반악기의 발달과 함께 널리 사용되어, 오늘날 국제 표준 조율법의 기반이 되었다.
동양, 한국의 12음계는 서양의 평균율과 마찬가지로 열두 음이 일정한 반음(semitone) 간격으로 배열되며, 이를 12율려라고 부른다. 율과 려는 각각 양율과 음려를 줄인 말로, 12음계에서 홀수번째 음들을 양율이라하고 짝수번째 음들을 음려라 하여 음音의 성질을 양과 음, 강과 유로 나누어 이해했다.
서양의 12음계(평균율)과 함께 발달한 화성학은 일종의 닫힌 세계를 형성했다. 잘 통제된 음률 체계로 인하여 균일하게 조정되고 고정된 음들을 활용하여 복잡한 수학적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12율려는 서양의 12음계과 같은 류의 창작적 동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12율려를 바탕으로한 한국의 음악은 우주의 음양 에너지 상호 작용에 음률을 통하여 참여하는 음악 행위, 즉 음률을 실재로 운용하는데에 집중한다. 그 운용 방식을 대우주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는 지구, 태양 및 달을 포함한 세 가지 주요 천체의 운동, 사계절, 24계절, 모든 하나에 존재하는 천-지-인 등 운동하는 다양한 구조들과 협력하도록 짜여졌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이해가 근현대에 와서는 음악 외적인 요소, 비과학적인 전근대적인 사상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주의 운용 원리 안에 음악의 원리도 함께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이해하고 음악적 원리를 '발견'하려는 태도는 단순히 단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실, 다층적인 현실을 이해하는 고차원적인 사고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우주가 수학으로 기술된다고 믿고 있다. 수학적 우주론은 강력해서 그것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의심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역시 우주의 기원과 구조를 음악과 연결시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일이다. 음악 이론은 고대로부터 수학의 일부였다. 만물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은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졌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에서 수적 질서를 찾아내고자 했다. 우주의 질서가 음악적이라는 말은 우주가 곧 수학으로 표현된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고대로부터 유래한 음악적 우주론은 환상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 그것의 형이상학적 기저를 의문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주가 ‘음악적’이라는 것을 다른 표현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음악적 우주론이 지칭하는 바는 단순한 수사적 차원만이 아니었다.”
“서구인들은 기술적 지배를 높이는 과정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구자현, <음악과 과학의 길: 본질적 긴장> (p128)
다시말해, 오늘날 현대의 음률 체계와 달리 12율려는 단순히 한 옥타브 안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는 열두 음의 집합이 아니다. 12율려는 여섯 양률의 율과 여섯 음려의 려로 구성된 12음계로써 음들의 각각의 에너지적 성질과 수리적 관계성 등을 포괄적으로 나타낸다. 더욱이 12율려는 현상계의 수리와 정확히 통하는 우주적인 시공의 순환이라는 판 안에 위치하며 모든 열두 음들은 격팔상생으로 관계를 맺고 함께 작용한다. 악학궤범에 실린 율려격팔상생응기도설律呂隔八相生應氣圖說에서 이를 잘 나타낸다.
이 도표에는 6시 방향에 위치한 황종(궁음)부터 반음 간격으로 시계방향으로 음이 순서대로 적혀있다. 그리고 원형의 이 도표 내부에 그려진 12각 별 모양은 궁음으로 부터 삼분손익하여 구하는 음의 발생 순서를 나타낸다. 또한 12율려 중에 궁상각치우에 해당하는 음들이 표시되어 있다. 나머지는 구간에는 십간지, 십이간지, 24절기 등의 정보가 기재되어있다. 중요한 것은 음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격팔상생’이라는 개념이다. 격팔은 말 그대로 여덟 칸으로 나눠진 구획을 상생, 즉 시계반향(순방향)으로 움직여 간다는 것을 말한다. 즉, 황종인 궁宮에서 격팔을 하면 임종인 치徵음(1시방향)에 이른다. 이는 서로 반대 극점에 위치하며 마찬가지로 양률과 음려로 서로 반대되는 음양 성질을 지녔다. 참고로 오행 이론에서는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라고 하여 물의 기운에서 나무의 기운, 나무의 기운에서 불의 기운 등으로 흐르는 방향성을 상생이라고 말한다. 위의 격팔상생 도표에서 십이간지를 보면 시계 방향으로 오행이 상생하도록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격팔상생으로 관계 지워진 두 음은 음정으로 나타내면 완전5도다. 격팔은 다만 음악과 음계 등의 특정 분야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대우주 바탕에서 동일한 물리적 원리가 소우주의 현실적 구조를 이루는 것은 전 분야에 걸쳐 나타나게 된다. 이는 한국의 전통 문화는 이를 바탕으로 문명의 기틀을 삼아 문화 예술을 운용하였음을 보여준다.
두번째 도표(아래)는 한 음에서 완전5도로 움직일때 모든 12음을 거치게 되는 평균율 12음계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5도권>과 황종(81)에서 삼분손익으로 발생하는 12음을 발생 순서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실제 정확한 음가와 수치는 조금씩 차이가 나겠지만 계단식으로 표현 가능한 음과 음의 관계를 생각해보았을 때에 격팔과 평균율의 완전 5도는 같은 간격을 이룬다. 무엇보다 삼분손익이 소리의 더욱 물리적인 표현인 율관의 비율로써 구해진다는 측면에서, 5도라는 음정이 물리적으로 표현된 유의미한 변화의 시작점과 같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듯 하다. 배음 이론에서는 기본음에서 발생하는 가장 첫번째 윗 배음이 한 옥타브 위의 음으로써 기본음과 같은 ‘성질’을 띄는 것이나, 그 다음의 윗 배음의 경우 첫째 배음으로 부터 5도 위에 위치한다. 완전 5도 관계의 음은 기본음과 다른 ‘성질’을 띈 첫번째 음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단 것이다.
12음계가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이든 서양이든 한 곡 안에서 모든 12음을 함께 사용하기보다 오음 또는 칠음을 선택하여 주요한 음계로 활용해왔다. 오음 음계는 비단 한국 전통음악 뿐만 아니라 현대의 락이나 블루스와 같은 다양한 음악장르에도 주요하게 사용되는 음계이기도 하다. 그만큼 물리적으로 궁음 또는 기본음에서 격팔로 또는 5도 인터벌로 구해지는 첫 다섯음이 주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국의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의 경우는 더 나아가 특정 음가를 지닌 소리들을 배열한 음계라는 제한된 의미를 넘어서서 각 음의 형상과 성질 등에 관한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전해진다. 오음은 오행에 맞게 구성되며, 이는 오색, 오방(사방과 중심), 오미(맛), 오성(수성, 화성, 목성, 금성, 토성) 등과 같이 운행된다고 본다.
오음을 위주로 사용하며 서양의 조성음악과 조성을 이동 시키면서 평균율이라는 특수한 체계의 장점을 이용하지도 않는데 12율려의 모든 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12음계에 속한 음들을 적절하게 쌓아올려 일종의 조화로운 하모니를 이뤄내는 서양음악적 의미의 코드(화음)가 부재한 한국 전통음악에서, 12율려의 음가를 그저 갖춰 놓은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녔다는 것인가?
다시금 격팔상생으로 궁음에서 이어지는 보든 12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궁에서 치로, 치에서 격팔하여 뻗어나간 반대편의 음은 다시 양률인 상商(3)이다. 상에서 우(10)로, 우에서 각(5), 각(5)에서는 율명으로 응종(12) 등으로 나아간다. 다시말해 하나의 궁음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뻗어나가 자신이 아닌 수도 없는 음을 발현시킬 가능성을 품은 음이다. 첫 궁음에서 나온 ‘치’음이 새로운 다른 궁음으로서 작용하면 여기서 발생하는 또 다른 12음이 있다. 이렇게 한 음에는 매우 복잡한, 무한하게 생성될 음들이 내재한다는 것이다.
앞서 <화성 -1>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국 전통음악에서는 한 음에 화음이 있다. 이는 음의 공간성을 확장함으로서 소리를 통하여 감정의 실감, 가사의 원근감 등의 실재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음악적 규율과도 같다. 악기나 소리를 내는 모든 기관들은 물리적으로 발생하는 소리의 여러 형태 중에서 음악적인 규격을 갖춘 소리라고 또는 방향 즉, 사방, 좌우, 상하의 팔방의 설정이 갖춰진 것이다.
궁(宮)은 중(中)으로,
가운데있어 사방에 통달하고
선창(先唱) 시생(施生)하여
사성((四聲)의 벼리이다.
그 성질은 둥글고
그 소리는
소가 동굴속에서 우는 것과 같아
합(合)을 주장한다.
-악학궤범-
현상계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사물과 사람의 감정이나 실제 몸에서 일어나는 기혈 작용들은 단지 추상적 정보만으로 그 존재가 모두 표현되고 구현될 수가 없다. 예컨대 한 사과가 있다면, 사과라는 매우 단순한 아이디어는 그 특정 사과의 정체성을 매우 잘 설명하는 개념, 말, 아이디어, 범주 등을 제공하지만 그 특정사과의 실재를 온전히 드러낸다고 할 수는 없다. 이 특정한 사과의 맥락, 자란 땅, 유통된 과정,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특정 사람이 느끼는 맛과 감촉, 겉으로 드러나는 색과 모양에서 조차도 이 특정한 사과는 ‘사과’라는 동일한 아이디어에 속하는 사과와 절대 같을 수 없는 분명하게 물리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음률의 각 음이름에 해당하는 소리는 이러한 특정 소리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추상적 정보이지 실체가 아니고, 그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는 과정, 소리로 직접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소리라는 자연적 물리적 실체의 무수히 많은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가능성에 수리적으로 분명한 ‘길’, 논리가 있음을 나타낸 것, 그것을 체계화 시킨 것이 바로 12율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