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날씨와 음계 -1

고대인에게 우주의 원리는 사람의 행사에도 매한가지로 작동한다. 그것이 소우주란 말에 담긴 뜻이다. 사람의 몸도 소우주이며 사람이 하는 일, 그 중 음악도 마찬가지로 우주와 같은 원리로 이뤄진다. 그 우주 중에서도 지구라는 특정한 행성에 자연적으로 주어진 물리적 여건은 당연히 음악의 물리적 작동에 영향을 미친다. 근대과학의 혁명은 물리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비물질적 요소 즉, 인간의 감관 및 관찰 도구로 확인 불가한 영역을 제거함으로써 일어났으며 고유의 합리성을 재정립하고 이전에 갖지 못한 독자적 학문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이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며 현대인의 기본적인 신념체계를 이루고, 이 패러다임 안에서 대부분의 음악적 논의도 일어난다. 예컨대, 과거 피타고라스는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모노코드(“모노코드는 한 줄의 현으로 이루어진 발현악기이다. 고대 그리스와 중세 시대의 음악 이론가들이 산술적으로 음정과 음계를 산출하기 위해 사용했다.”, 악기백과)로 보고, 한 옥타브 내 일련의 음들과 행성, 색 등이 상호적으로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이러한 이해와 접근은 과거의 유물로 여겨지거나 창작을 위한 상상의 토대가 되어줄 뿐이다. 그보다는 현재 국제적으로 합의된 음가의 규격에 맞게 또는 전기적 신호로 변환 가능한 소리에 대한 탐구 정도로 확장될 뿐이다. 이 모두 수치적인 데이터화가 가능한 영역에 있으며, 소리를 독자적이면서 대상화된 물질로 인식하여 다룬다. 이는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수리철학자의 이론이 오늘날의 수리과학의 학문적 성과에 비견하여 우주의 진리를 밝히기에 역부족이었다고 하더라도, 대전제에 관한 한 분명 재고할 필요가 있다. 지구와 긴밀하게 관계된 주요 천체들이 지구에 미치는 작용이란 의미에서의 우주적 원리가 지구 내 존재의 생사와 모든 활동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한국의 문화에서 ‘’과 ‘’, ‘날씨’란 말은 오묘하게도 지구과학적인 현상에서 부터 언어, 공예나 물건에 까지 광범위한 현상과 본질을 아울러 꿰뚫는다. 날씨(경위)는 씨실 날실이 종횡으로 얽혀 하나의 직물이라는 존재됨을 이루듯 하다. 날씨는 기후적 현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무쌍한 기후가 날과 씨의 얽힘, 부딪힘, 합으로 드러나고 나타난다는 것 일종의 본질적 ‘체’를 담은 말이다. 지구라는 중성적 바탕에 일월음양의 종자가 작용함을 일컫는 말이다. 이번 “날씨와 음계” 1편에서는 우선 날과 씨에 담긴 의미를 다각도로 살펴보고자한다.


정경작업을 마쳐 날줄이 길게 늘어져있다. 배 모양의 북이 씨줄을 싣고 좌우로 가고 오며 직물을 짜게된다.

베를 짜는 사람을 기준으로, 날줄은 ‘저기’ 멀리있는 지점에 단단히 고정되어 길게 뻗어 내려온다. 씨줄을 엮어 직조하는 일은 ‘여기’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이는 마치 새로운 날을 오가며 살아가는 인생과 같다.

칼의 날이 서있는 모습이다. 칼의 본질은 무언가를 베는 일을 수행하는 기능이다. 칼의 날이 긴장감 있을 정도로 잘 서지 않았다는 것은 칼이 자신다움을 잃은 것과 같다.


날줄과 씨줄

베틀을 사용할때에 먼저 세로로 길게 뻗은 날줄을 걸어 기준을 잡는다. 제대로 정렬된 날줄이 준비되면 씨줄이 날줄 사이를 좌우를 왔다 갔다하여 직물을 짠다고 한다. 날줄은 상하로 길고 씨줄은 좌우로 짧다. 씨는 말 그대로 씨앗이다. 기준이 되고 바탕이되는 ‘날’ 위에 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흩뿌려진 ‘씨’가 격자로 얽혀 합을 이룬 것이 직물이다. 씨는 시시각각의 때이고, 날은 지구의 자전축이며 자기장의 흐름이다. 씨는 시(時, time)를 주도하고 날은 공(空, space)을 주도한다. 날씨는 지구의 날과 일월의 씨가 조화를 이룬 것 다름 아니다.

지구에도 경위經緯가 있다. 옛날에는 경도와 위도를 날도와 씨도라고 했다고 한다. 순수 우리말인 ‘날’과 정도(degree)를 뜻하는 ‘도度’자가 합쳐진 날도가 한자어로는 경도(度, longitude)이고, 씨도가 위도(度, latitude)인 것이다. 경도의 경經자는 글자의 시각적 표현 그대로 베틀의 날줄의 의미를 지녔다. 경經은 실 사糸자와, 물줄기라는 뜻도 있으나 본래 베틀 직기 사이로 날줄이 지나가는 모습을 형상화 한 문자인 巠이 결합하여 나온 문자다. “”은 형태적으로 남북 또는 상하로 길게 뻗어 각 극점에 고정된 것이며, 그 핵심 질적인 속성은 씨줄이 얽혀가며 직조할 바탕과 기준이라는 점이다.

직물 조직을 할 때에, 날줄을 가지런히 적당히 팽팽하게 제대로 세워야만 씨줄이 제대로 꿰어질 수 있을 것이다. 베틀에서 날줄을 바루는 작업을 정경整經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정한 길이의 날실을 필요한 수만큼 가지런히 펴서 도투마리에 감는 일” 이라고 한다.

이 경經자는 인간의 삶을 사는데에 있어 기준을 제시하는 큰 가르침을 지칭하는데에도 쓰인다. 성경, 불경, 경서, 경전 등이 날줄의 본질적인 의미를 가져온 예시다. 바로 인간이 씨줄을 엮어내듯 살아내는 다양한 삶이 짧게 지나가는 동안, 이를 가로지르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씨줄이 아름답게 엮어갈 수 있도록 바른 날줄을 세워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일 것이다. ‘날을 세운다’는 관용구는 성격 등이 날카롭다는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이지만 본래 ‘기준을 제대로 세우고 정신을 올곧게 한다’라는 뜻이고 ‘칼날을 세운다’는 것을 무뎠던 칼날을 날카롭게 다듬어 그 쓰임에 맞게 하는 일이다. 칼날의 ‘날’도 날줄의 날이며, 설날의 ‘날’, 하루를 뜻하는 ‘날’도 모두 같은 ‘날’이다. 어쩌면 일인칭 자아를 지칭하는 ‘나’와 ‘날’ 또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란 존재의 ‘날’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서야(자립自立) 인생의 희로애락도 견디어 지내고 성장하며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추며 건실하게 가꿔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척추들이 모여 척주라는 단단한 기둥이자 중심축을 만든다. 12쌍의 갈비뼈는 12개의 각 척추와 좌우로 연결되어 종으로 긴 척주와는 직각을 이루며 횡으로 얽혀있다.

‘나’라는 자아 의식이 있는 사람 몸의 ‘날’은 척주脊柱다. 척주는 위로는 머리를 받치고 아래로는 골반과 연결하는 몸의 중심축이다. 척주의 상층부에는 팔이 두 갈래로 뻗어있고 골반 아래에는 다리가 두 갈래로 뻗어있다. 그리고 몸의 중심부인 흉곽의 갈비뼈는 장기를 보호하고 특히 호흡작용과 운동에 관여하는 유의 성질을 지닌 뼈로, 강의 성질을 지닌 척주에서도 12개의 흉곽척추(thoracic vertebrae)에 붙어있다. 척주는 수직으로 뻗어 몸통의 중심과 기준을 잡아주고, 유한 12개의 늑골(12 pairs of ribs)은 지구를 둘러친 위도선들 처럼 수직의 척주 사이를 가로질러 연결되어 있다. 척주라는 ‘날’이 바로 서면 12개의 갈비뼈는 호흡기관의 움직임을 지지하며 수시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베틀에서 씨줄은 상하로 고정된 날줄 위를 좌우로 오가면서 직물을 엮어간다. 씨줄은 날줄을 가로지르며 직물의 폭을 만든다. 씨줄의 씨는 씨앗이다. 지구의 자기 극점과 지리적으로 합의된 경도/위도의 극점, 또 자전축의 극점이 이루는 축의 각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남-북이라는 축의 방향은 일치한다. 지구의 자기장은 그 축을 중심으로 남극에서 뻗어 나와 북극으로 흘러 다시 중심으로 흐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지구 자기장은 지구의 구체를 세로선들로 둘러싼 모양이다. 또 다른 세로선으로는 자전축이 있다. 이 모두가 지구의 날줄이다.

지구 상 만물의 다양한 생명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천체는 해와 달이다. 지구의 날(축)이 어떻게, 어떤 각도로 서있는가에 따라서 해와 달이 지구에 뿌리는 “씨”의 그 영향이 달라진다. 태양의 빛이 광선으로든지 광자로든지 지표면에 당도하는 태양 에너지는 지구의 날을 가로지른다. 물론 일월의 빛이 가로로 지구의 날 위를 오가는 것은 지구의 자전 때문이다. 자전축이 위 아래 두 극에 고정되어 좌우로 회전함으로 인하여 두 천체의 에너지가 가로선으로 지구 위를 수놓는다.

하나의 경도선을 상상해보자. 이는 마치 기타의 양끝에 메어놓고 팽팽하게 적당한 장력을 준 기타줄과 같다. 저 멀리 태양의 빛 광선 또는 광자가 그 특정 경도선에 부딪혀서 기타줄에 손가락이 다가와 틩기듯 경도선에 힘을 가한다. 길게 뻗은 그 세로줄의 어떠한 위치에 비추냐에 따라 지표면에 가하는 태양 에너지의 힘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즉, 적도에 가까울 수록 태양은 많은, 적도에서 멀어질 수록 태양은 적은 양의 에너지를 미친다. 기타의 프렛 위 손가락이 어디를 짚고 있느가는 위도를 특정한 것과 마찬가지다. 바이올린에서 글리산도로 연주하면 모든 가능한 음이 이어져 한 방향으로 변화하는데 이처럼 위도에 따라 빈틈없이 빛이 다른 힘을 가한다고 볼 수 있지만, 지구상에서 실제로는 기온이나 전반적인 기후는 위도대별로 어느 정도 통일된 특징이 나타낸다. 이는 음계도 음과 음 사이에 일정한 층계가 있다. 빛도 소리도 무한하게 연속적으로 존재하지만 실재적으로 운용하는데에 있어서 단위화 되는 것이다.

베틀을 짜는 모습과 비슷하게 기타 연주에 있어서도, 연주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저기(북극)’에 걸려 고정된 줄이 길게 뻗어 연주자 가까이의 다른 한 극점인 ‘여기(남극)’에 걸린 모습이다. 연주자는 자신의 정과 신을 모아 그 줄을 튕긴다. 날이 선 기타라는 장field 위에 짧게 튕기는 연주자의 에너지는 ‘날’ 즉 ‘현’을 진동시키고 기타를 길게 울리는 작용을 한다. 짧게 튕긴 ‘씨’와 그 씨가 연이어 ‘씨줄’처럼 기타의 (날)줄들과 합을 이뤄 곡조를 이룬다. 이때 연주자의 에너지가 씨앗같은 하나의 튕김으로 응축되어 기타 줄에 작용하는 것은 또 다른 ‘날’과 ‘씨’가 연주자라는 중성적 장이라는 셋이 합일을 이룬 결과다. 연주자의 주체적 의식과 존재라는 ‘날’에 음악적 아이디어라는 ‘씨’가 연주자의 기氣인 몸에서 만나서 나온 씨앗이 바로 기타 날줄 위를 수놓는 무수한 씨앗들인 것이다.

씨는 다른 말로 종자다. 흔히 아들 자子로 알고 있는 이 글자는 종자라는 단어에서는 종자와 같이 씨앗이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다. 한글의 초성과 종성은 모두 자음子音인데 중성인 모음母音에 상응하여 어미와 아들로 해석하기보다는 모음은 씨를 강유의 두 씨를 품어 기르는 “母” 하나의 중성적 장field로, 자음은 종자, 씨앗으로 모음이라는 밭이 심기어 생명작용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물리적 실재와 이치에 더 합당하다. 여성의 몸에는 자궁이 있다. 자궁은 중성적 장field이다. 어미 모자와 여자는 단지 사회적 역할에서만 다른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행위와 역할이 다르다.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모두 자궁을 지니고 있지만, 자궁에서 정자라는 아빠의 씨와 난자라는 엄마의 씨가 합을 이뤄 새로운 생명체, 아이를 생산할 때에 여성은 엄마가 된다.

글씨, 마음씨, 솜씨, 맵씨(맵시), 말씨 등의 표현에서의 -씨도 씨줄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말씨를 예로 들면 서울 말씨, 충청도 말씨와 같이 지역적인 차이나 화자의 개별적 말의 꼴, 형태의 독특성을 일컬을때에 씨자를 붙여 말씨라고 한다. 마음씨도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마음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개성과 의지에 따라 다르게 쓰는데, 그러한 다양하게 드러나는 개별적 마음이 쓰인 모습을 마음씨라도 하는 것이다.

지구의 세로인 날줄에 가로로 얽혀가는 태양과 달의 씨줄이 바로 날씨다. 사람의 글씨와 마음씨가 저마다 다르듯이 지구 날의 씨도 제각각이고 변화무쌍하다. 위도에 따라서는 그 다름의 폭이 크게 나타난다. 지구의 날(지축선)도 매일 조금씩 다르게 선다. 이에 따라 태양의 씨와 달의 씨가 지구라는 장field에 다르게 작용한다.

경도인 longitude는 중세영어에서는 길이, 길다, 긴 상태를 뜻했고 이는 라틴어의 longus (long)에서 나온 longitudo가 그 어원이다. 위도인 latitude는 라틴어의 latus(broad), latitudo에서 나왔다고 한다. Longitude는 위아래로 긴 상태를, latitude는 폭, 너비와 관련있다.

날이 선 자리가 바로 주체의 중심이다. 중심은 곧 작용이 일어나고 이뤄지는 바탕이며 장이다. 해와 달의 에너지가 만나고 어우러져 작용을 하는 장소가 바로 지구라는 공간인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세로선인 ‘날’이 곧 공(space)이고 가로선인 ‘씨’가 시간(time)이다. 때를 뜻하는 시時는 태양광선日이 땅土위에 긋는 마디寸다. ‘위선’은 ‘씨’와 ‘줄’의 각 글자의 뜻이 그대로 반영된 한자어로, 위의 뜻도 씨앗이다. 즉, 짧은 호흡으로 떨어져 걸리는 직물의 씨줄의 ‘씨’와 같은 도량형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나아가 실재 씨줄이 정경된 날줄을 휘감듯이 짜여지는데 이러한 운동의 모습도 경선을 오가는 위선의 모습과도 절묘하게 같다.

緯자는 ‘가로’나 ‘씨줄’, ‘짜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緯자는 糸(가는 실 사)자와 韋(다룸가죽 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韋자는 성(城)을 중심으로 위아래에 발을 그려 넣은 것으로 ‘둘레’라는 뜻이 있다. 緯자는 이렇게 ‘둘레’라는 뜻을 가진 韋자에 糸자를 결합해 ‘실을 두르다’라는 뜻을 표현했다. 여기서 ‘실을 두르다’라는 것은 날실을 실패에 빙 둘러 감는다는 뜻이다. 緯자에서는 이것을 ‘가로 방향’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緯자는 실을 가로 방향으로 휘감는다는 의미에서 ‘가로’나 ‘짜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 신동윤, “한자로드(路)”

반대로, 영어의 latitude는 이를 직물짜기라는 맥락에서 관찰하면, 직물의 폭이자 가로선이라는 측면에서 씨/위와 동일한 뜻을 나타낸다. 그러나 짧은 가로선으로써의 폭이라기 보다는 넓게 펼쳐진 수평선으로써의 이상수가 단어의 핵심 이미지로 발현된 듯이 보인다. 지구의 좌표를 나타내는 위도인 latitude가 이와 다른 맥락으로 쓰일때에는, 어떤 주체에게 주어진 ‘생각과 행동의 자유의 폭/공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There is considerable latitude in choosing the color scheme for the project, giving designers the freedom to express their artistic vision. 프로젝트의 색 구성을 선택하는 데 상당한 여유가 있어 (자유의 폭이 있어) 디자이너들은 자유롭게 예술적인 비전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Chat GPT 문장 제시 및 번역)”라고 할 때에 ‘latitude’는 디자이너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고 그만한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심도있게 따져보면 이는 ‘씨/위’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문장 자체에는 드러나있지 않지만, 이미 정해진 공동의 룰이나 틀이 존재하여 — 이는 ‘날/경’에 해당한다. — 개별 디자이너가 이에 맞추어 창작을 해야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있다. 그런 중에 자유의 폭으로써의 latitude는 특정 주체에게 상대적으로 제한되거나 더 자유로운 정도의 선택권과 결정권 등을 제공함을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latitude도 특수성, 특정 주체가 전체 속에서 드러내는 다양성에 관한 것이므로 씨/위와 일맥상통한다. 다만 이 latitude는 자유의 범위가 보다 넓어짐을 강조하는 뜻으로 쓰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한된, 작거나 짧은, 수축된 이미지가 아닌 그 반대의 여유롭게 넓혀진 공간과 자유라는 의미, 확장된 이미지와 뉘앙스를 갖고 있다.

Previous
Previous

14 날씨와 음계 -2

Next
Next

12 변화와 계승